밤 10시 남짓 늦은 귀가시간이다. 3호선 교대역에서 환승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 젊은 20~40대다. 50대 이상쯤 돼 보이는 사람을 찾아보지만 쉽게 보이지는 않는다.
‘젊은 청춘들이구나’
‘경제 활동의 황금기 청춘들이지’
‘50대 이상은 어디 갔을까?’
주류가 아님을 확인하는 습관이 둘러봄이다.
독서모임 참석 전에 두근거린다. 사실 등록부터 고민이 깊다.
‘내가 분위기 흐리는 건 아닐까’
‘내가 나이가 가장 많을 텐데... 못 따라가면 어쩌지?’
물 흐리는 어색한 사람이 될까 봐 주저하게 된다.
MZ와 함께 하는 회식 참석도 고민된다. 공적인 자리도 사적인 자리도 다 마찬가지다.
‘카드만 줄까?’
‘아니야 성의 없게 보일 수도 있어. 1차만 참석하고 빠져야지’
말 안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나 때문인가 싶어 분위기를 살피게 된다. 낄낄 빠빠가 내 말인양 싶다.
중년 딱지는 암묵적 핸디캡이 되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이 없어지고 눈치를 살피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우리 사회는 세대 간 섞임이 불편한 사회다. 청년은 중년 눈치를 보고, 중년도 청년 눈치를 본다. 끼리끼리가 편한 경향이 짙다.
중년은 애매모호하다. 젊은데 청년이 아니고, 나이가 있는데 노인이 아니다. 뭐든 할 수 있는데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이 중년이다. 자신을 스스로 과소평가하기 쉬운 나이도 중년이다. 심지어 칭찬도 걸러 듣는다. 칭찬인데 2% 뺀 기쁨으로 받는다. 내 안의 우려는 2% 더해서 느낀다. 총명함도 떨어진 것 같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아 몸을 사리게 된다. 마음만 청년인 상태가 중년이다.
이태원 거리를 걸었다. 약속 장소를 향한 길목에서 발견한 외국인 중년 부부모습, 인상 깊었다. 카페 앞 노포테이블에서 케이크 한 조각에 뜨거운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남자분의 청바지 패션이 눈에 들어왔다. 무르팍이 훤하게 보일 정도로 넓게 찢어진 청바지다. 차가운 봄바람이 찢어진 틈으로 들락거리고 눈부신 봄볕은 청바지 표면을 데우고 있었다. 내복을 부르는 3월의 차가운 바람은 거칠었고 님도 못 알아보게 피부를 태운다는 봄볕은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얄미운 봄날씨 속 중년 부부의 낭만과 여유는 어디서 본 듯한 명품 벽화 같았다. 중년의 여유로움이 멋스러웠다.
배움은 성장이다. 무엇이든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나이가 중년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기다. 쫓기지 않고 내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 경쟁할 필요도 없다. 중년이라서 천천히 흡수되는 배움을 즐길 수 있다. 삶의 지혜가 녹아든 배움은 밀도가 높게 마련이다. 밀도 높은 성장이 중년을 명품으로 만든다. 당신 그대로가 명품이 된다.
삶에 의미를 더하면 가치가 생긴다. 거친 삶 속에서 어수선하게 흩어졌던 파편들을 모으는 시기다. 내 인생을 유의미한 가치로 재구성하는 시기다. 한 줄 문장을 이야기로 완성하기 적절한 때가 중년이다. 다듬어진 파편들이 엮여 내 삶의 서사가 된다. 내 역사가 작품이 된다. 당신 그대로가 명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