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늦은 밤 11시, 자정, 새벽 1시 아주 가끔은 새벽 4시에 초인종이 울린다. 새벽 4시는 우리의 주변을 깨끗하게 치워주시는 환경미화원들이 새로 시작하는 하루의 출발선이다. 이 시간에 어제를 마감하는 남편들이 많았다. 택시비 할증을 피하기 위해 아예 4시까지 달린다는 핑계 애호가도 흔했다.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문 열어달라 누르는 초인종은 깊은 밤의 정적을 부수는 소리이자 불길한 예감의 신호탄이다. 지금처럼 자동 도어록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집 안에서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40대 후반 이후 세대의 신혼기는 대부분 해당된다. 잠자던 가족을 깨워야 들어갈 수 있었다. 불길한 논쟁의 시작 알림을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는 피하고 싶은 버튼, 초인종. 그러나 돌아갈 곳이 여기라 반드시 눌러야 하는 띵동!
일 때문이건, 술 때문이건 지친 피로감을 이끌고 들어오는 내 집 현관에서 듣는 첫마디 “또 술이야?” 이 말은 왜 싫을까? 왜 서운할까? 왜 부인은 이 말밖에 안 할까? 그러나 그 한마디마저 사라지는 때를 경험했을 것이다. ‘찰칵’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등이 사라지는 흐릿한 모습을 바라보며 신발 벗기를 수년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 등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가족구성원의 도움 없이 나 혼자 들어올 수 있게 현관의 출입 시스템도 개인화되어 편해졌다. 과학의 발전이 나를 자유롭게 해 준 건지 나의 외로움에 한 스푼 양념을 더했는지 딱히 규정짓기 힘들지만 아무튼 이런 흐름으로 변했다.
‘또 술이야?’에 가려진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술 취해서 늦게 귀가하며 ‘나 일 마치고 힘들어서 한잔했어’에 가려진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서로 한 꺼풀만 벗기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를 수십 년째 끌어가고 있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부부친밀감 제로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의 말에 위로받으며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이런 커플들이 많다. 어쩌면 대부분인 것 같기도 하다. 대부분이라는 말에 나만 그러는 게 아닌 것 같아 또 위로가 되는가? 위로를 주기 위한 말이 아니다. 멀리까지 와버린 지금의 나를 돌아보기 위해 소통의 실마리를 찾길 바라고 건네는 말이다. 찾아보자. 찾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해 보는 것이 먼저다.
서로의 입장에 대해 이해를 하면 문제 해결은 아주 쉽다. 이해하면 인정을 하게 되고 위로를 주게 되고 소통이 뚫린다. 소통이 뚫리면 이해 못 할 부부는 없다. 부인은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개인적 자유를 반납하고 양육에 저당 잡힌 긴 하루를 보냈다. 자식이 소중하지만 육아만으로 자아를 전부 채우기는 뭔가 공허하다. 그래서 바빴지만 긴하루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내 반쪽이 필요한 것이다. 늦게 와서 화났거나 술 마셔서 밉다가 전부가 아니다. ‘또 술이야’ 맨트는 현실적으로 맞이한 순간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내 마음 좀 살펴줘'의 변형된 표현이다. 생각해 보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에 삼사일 아니 거의 매일 이렇게 늦으니 기다림도 지치지 않겠나. 당신 같으면 지속하는 것이 쉽겠나. 아니, 할 수 있겠나.
‘나 일 마치고 힘들어서 한잔했어’ 이 핑계의 유통기한은 신혼기 까지라는 사전교육은 받은 적 없지만 대부분 그때까지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기 힘드니 맨트를 몇 번 바꾸다가 술기운에 흔들리는 몸으로 대신했을 것이다. 당신이 듣고 싶은 말은 ‘오늘 많이 힘들었지. 어서 들어와. 고생했어’ 일 텐데 생각해 보라.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해 보자. 정말 일 때문에 힘들어서 늘 마셨나. 친구들과 모처럼 만나서 즐거운 만남을 갖기도 했을 텐데 그 핑계는 집에서 기다리는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에 업무상이라고 둘러대지 않았을까? 내 아이를 너무 사랑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또 다른 출근’이 될까 봐 일부러 늦게 귀가한 적은 없는지? 아이와 씨름하느라 힘들었다 매일 투덜대는 부인이 귀찮아서 잠든 밤을 일부러 선택한 적은 없는가? 남편의 힘듦을 이해하는 마음과 나를 알아주지 않는 남편의 서운함이 섞인 부인의 답답한 마음은 폭발하거나 침묵으로 굳어져 간다. 가깝고도 먼 당신과의 기나긴 여정 위에 놓인다. 내가 듣고 싶은 “여보 오늘도 힘들었지? 수고했어요” 이 말은 인공지능만이 변함없이 꾸준히 해낼 수 있다. 감정을 가지고 소통하는 인간은 지칠 수밖에 없다.
다른 핑계보다 유난히 자주 쓰는 '나 오늘 힘들어서 한잔했어’, 이 말을 계속, 변함없이, 꾸준히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 기저에 가정 경제를 위한 수입을 책임지고 있는 당당함에서 출발한 멘트일 가능성이 크다. 경제력만 있다고 가정이 온전히 꾸려지지 않는다.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는 경제력을 갖고 오는 사람과 대부분의 육아와 가정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합작으로 만드는 공동 작품 공간이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회전운동을 전달하는 자동차의 변속기처럼 두 사람이 톱니가 되어 잘 맞춰야 유지된다. 자전거의 체인이 풀리면 바퀴는 헛돌고 더 이상 힘을 잃어서 달릴 수 없다. 가정은 둘이 함께 맞춰야 힘이 작동하고 유지되는 것이다. ‘돈의 속성’ 저자 김승호 회장은 아내가 가정을 맡아주었기에 당신이 일을 할 수 있었다고, 그래서 아내에게 지분 50%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혼하고 갈라설 때 50%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안전하게 유지하면서 가정이 꾸려지는 모든 과정에 50%의 지분이 부인에게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돈을 벌어오니 내가 암묵적 갑이라는 논리가 있다면 얼른 생각을 고쳐먹기 바란다. 그래야 소통의 실마리를 그나마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