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투파이브세컨드 성수 하우스
좋아하는 향 있으신가요? 저는 치자나무꽃 향을 좋아합니다. 그 향을 맡으면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죠. 5, 6월만 되면 아파트 화단에는 치자나무가 상아색 꽃을 만개합니다. 0.5평 정도 되는 좁은 땅에 몇 안 되는 꽃을 피우지만, 그 향은 아파트 초입부터 은은히 거리를 가득 채우죠. 5월은 새 친구들과의 어색함이 무르익고, 날씨도 포근하여 학교에서 추억 쌓을 일이 많습니다. 소풍, 체육대회가 가장 많이 열리는 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치자나무꽃 향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그 끝을 매듭짓게 도와주는 꽃 향 덕분에 지금도 그 향을 맡으면 학창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특정 향을 맡으면 특정 사건, 인물이 떠오르는 그런 순간 말이에요. 이처럼 향은 기억을 소환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포인트투파이브세컨드(POINTTWOFIVE·SECOND)는 향이 가진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브랜드 이름에서도 그 힌트가 있죠. 0.25s로 바꿔 쓸 수 있는데, 이 0.25초는 사람의 뇌가 향을 인지하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죠. 그래서 제품 설명도 꽤 특이합니다. 보통은 향수의 휘발 정도에 따라 탑노트, 미들노트, 베이스노트로 구분하여 각각을 차지하는 향을 시트러스, 우디, 로즈 등에 비유하며 이해를 돕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복이 쌓인 눈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 도시 새벽을 거닐며 느낀 공허함을 이야기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순간을 꺼내고, 그것이 향으로 어떻게 치환되었는지 궁금하게 합니다.
이 브랜드가 전개하는 새로운 공간, 성수 하우스에서 그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향을 통해 추억을 상기하다가도 사막의 밤, 미지의 세계와 같이 경험하기 어려운 순간도 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죠. 무엇보다 이곳의 매력은 향을 넘어 미각까지 건드는 식음료 체험인 티 솔로지(Tea Thology)일 것입니다.
티 솔로지는 차와 디저트의 맛과 플레이팅으로 특정 시기나 장소의 그리움을 건드리며 '나'의 이야기를 꺼내어 볼 수 있는 여정입니다. 그 주제는 '꿈의 여정'이지요. 꿈은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꿈의 기억은 오직 본인만 들춰내 볼 수 있죠. 그러나 실제 꿈은 내가 통제하지 못하지만, 이곳의 여정은 스스로 꿈을 설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제시된 선택지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며 남들과 다른 개인적 경험을 완성해 나갈 수 있죠.
사전 작업 없이 티 솔로지를 체험한다면, 몰입도가 떨어질 것입니다. 운동도, 차를 우릴 때에도, 글에서도 준비 운동, 예열, 서문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정신과 몸의 상태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성수 하우스는 4층에 티 솔로지 프로그램을 마련해 두고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오르며 몽환적인 공간에 빠져들게 합니다.
외관에서부터 신비한 이미지가 강합니다. 메말라 갈라진 흙의 질감과 같은 검은 콘크리트 벽이 타원형의 덩어리를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 타원형 덩어리는 반투명 유리로 감싸져 있는데, 그 너머로 나선형 계단과 그것을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비춰 보이죠. 입구는 정면에 바로 드러나 있지 않고 검은 벽에 감싸져 살짝 숨어 있습니다. 포인트투파이브세컨드는 향을 통해 개인의 기억을 들춰내기 때문에 프라이빗한 접근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면, 반투명 유리로 한번 걸러진 은은한 빛이 온통 흰 내부를 밝히고, 위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은 하나의 오브제로 공간의 지루함을 덜어내죠. 공간의 중심에는 조형물 위에 얹어진 향수가 공간의 중심을 잡습니다. 다시 계단을 타고 오르면 여러 개의 향수와 그것을 담는 철제 가구가 공간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스테인리스 소재 또한 빛을 반사해 형형할 수 없는 색과 패턴을 만들어 반투명 유리처럼 공간을 몽환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합니다.
빛만 들어오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에서 이제 꿈의 여정으로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구리 강관이 천장을 타고 아래로 쏟아지는 4층에 올라 자리에 앉으면, 직원 두 분이 차와 디저트를 준비해 줍니다. 여정은 총 4단계로 진행됩니다. 먼저 첫 번째 여정 '경계 속으로'에서는 현실을 떠나 꿈속으로 내딛는 첫 발걸음의 긴장과 설렘을 담은 목련 블랜딩 티와 밤 강정, 레몬 정과, 잣 사탕이 세팅됩니다. 청량하고 시원한 티에 달콤하고 때론 새콤한 디저트가 현실의 입맛과 기억을 잊도록 도와주죠. 차를 다 마시면 분홍 차를 내어줍니다. 히비스커스와 루이보스, 레몬그라스가 어우러지며 탄산이 있죠. 마치 게임 속 포션을 마시듯 비현실 세계에 정말로 발을 들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인 '탐험하다'와 '성찰하다'는 본인이 직접 여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탐험하다'에서는 '나의 꿈은 물빛 환상'과 '바스러지는 의식 너머로 부풀어 오르는 나의 세계'를, '성찰하다'에서는 녹차, 홍차, 감입차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죠. 선택에 따라 테이블에 놓이는 종이 또한 달라지고 그 종이는 외벽처럼 반투명해 점점 이전의 사건을 덮어씌웁니다.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잊어버리는 꿈과 같죠. 마지막 이야기인 '깨어나다'에서는 매화꽃을 담은 시원한 차를 건네줍니다. 손과 입에 닿는 차가운 찻잔과 차 한 모금이 현실로 되돌아오게 돕습니다.
이 여정에서 차와 디저트, 단계마다 추가되는 종이도 중요합니다만, 그것을 담는 찻잔과 접시에도 주목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차의 색이 강렬할 때는 반투명의 찻잔과 그릇에 내어주는가 하면, 포슬포슬한 질감이 살아있는 디저트에서는 표면이 거친 도자기 그릇에 음료와 디저트를 내어주거든요. 냉차는 스테인리스 소재로 된 찻잔에 담겨서 나오죠.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여정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1시간 반가량의 체험이 끝나면 다시 3층으로 내려가 각 향을 시향해 볼 수 있습니다. 티 솔로지를 체험하기 전에는 제품이 가진 이야기에 집중해 향을 맡았다면, 이번에는 여정 동안에 떠오른 꿈과 비슷한 향을 찾아나갑니다. 행위의 주체가 나로 바뀐 것이죠.
생각해 보면, '꿈의 여정'은 단순히 잠을 잘 때 꾸었던 꿈을 상기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현실에서 마주한 순간을 꿈으로 치환해 좋은 순간은 꿈의 달콤함처럼 포근히 나를 감싸고, 나쁜 순간은 깨어나면 잊히는 꿈처럼 기억에서 지워나갑니다. 차를 건네받을 때마다 겹치는 종이처럼 나쁜 기억은 서서히 사라지고, 좋은 순간은 재빨리 나의 상황과 비슷한 문구의 향수를 찾아 기억을 선명히 바꾸죠. 향은 기억을 소환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건축 : 소피힉스( @sophiehicksarchitects ) + 요앞건축사사무소 ( @yoap_architects )
사진, 글 : 신효근 ( @_hyogeun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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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_경험을_주는_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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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 왕십리로14길 20
매일 12:00 - 19:00
티 솔로지는 사전 예약을 통해 이용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