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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Dec 07. 2021

인상주의란 말은 오명이었는가 (1)

혁신과 환상 사이의 기원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예술은 때때로 신화로 덧칠된다. 이런 신화에서 예술가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작품으로 큰 비난을 받으며 먼 후일에 가서야 진가를 인정받는다. 특히 근대 이후 예술가들의 주관적인 표현이 중요시되자 이런 신화는 대가들의 고난과 영광을 설명하는 당연한 서사로 받아들여졌다. 인상주의의 기원을 둘러싼 이야기는 이런 신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874년 4월 15일 나다르의 사진관에서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가 열렸다. 전시는 시작부터 대중과 평론가들의 비난에 시달렸다. 그들을 옹호한 인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작품이 자격 미달의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뒤이어 열린 작품 경매 또한 기대치 보다 낮은 판매 수익을 거두었으며 이것은 그들이 전시를 위해 설립한 협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 한 마디로 요약해 그들은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다. 1874년 전시에서 인상주의자들이 받은 비난은 르 샤리바리(Le Charivari)의 비평가였던 루이 르루아(Louis Leroy)의 비평문에서 잘 드러난다. 글은 화자로 설정된 나와 뱅상이라는 화가가 전시를 관람하면서 나눈 가상의 대화 형식을 취한다. 전시를 둘러보며 뱅상은 '인상'을 묘사한 작품들의 서투른 묘사에 분개한다. 피사로, 세잔, 모리조 등 출품작을 관람한 그의 시선은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 앞에 머무른다. 


무명예술가, 화가, 조각가, 판화가 협회 전시 카탈로그와 전시가 열린 나다르의 스튜디오


나(비평의 화자)는 이 베르탱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은 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당황스러움은 내게도 절박해 보였다. 그의 파탄을 일으킨 마지막 한마디는 모네를 겨냥했다.

"아 여기 그가 있구먼, 여기있어"라고 그는 98번 작품 앞에서 외쳤다."파파 뱅상이 좋아하는 그를 알아보겠네! 이 그림은 뭘 그리고 있는 것이지? 도록 좀 보세"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이었다.

"인상- 그런것 같군. 나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네. 틀림없이 어딘가에 인상이 있을거야... 그런데 이 자유로운 붓질을 보게! 이제 막 만든 벽지도 이런 바다 풍경보다는 더 완성도가 있겠군"

나는 숨이 넘어갈 듯한 그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망측한 것에 홀려 있었다. 

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까치, 2006, pp. 220-221.(몇몇 오역은 인용자가 임의로 수정, 괄호는 인용자주)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탄생설화로 인용되는 루이 르루아의 비평은 몰이해로 점철된 현대미술의 역사를 예고함과 동시에 그들이 차후 겪게 될 고난의 전조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진짜 그러한가? 적어도 미국의 미술사학자인 존 리월드가 위의 비평을 인용했을 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오던 인상주의를 현대 예술의 아버지격의 위치로 올려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학자들 중 한 명이다. 1946년 초판이 발간된 <인상주의의 역사>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저서다. <인상주의의 역사>는 인상주의 연구를 넘어 미술사 분야의 고전으로 불리며 20세기 내내 해당 시기 이해를 위한 중요한 저서로 인정받았다. 적절하게 배치된 도판과 풍부한 1차 사료, 시대 상황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운동에 대한 거시적 통찰은 오늘날에도 이 책이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나온지도 오래된 존 리월드의 저서가 2006년 한국에서 처음 번역되었을 때 그것은 고전일지언정 최신 성과를 담고 있는 책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20세기 중후반 미술사학계에서 활발히 진행된 19세기 미술에 대한 연구는 리월드가 수집, 분석한 자료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에 따라 그의 저작이 가지고 있는 정전과 같은 입지는 점차 축소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인상주의의 기원을 둘러싼 이야기는 심지어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공고한 서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에 균열이 일어난 것은 90-00년대를 즈음하여 1870년대 전후 프랑스 미술 비평의 지형도와 미술 담론에 대한 연구 성과가 정립된 이후였으며 이후 서술하게 될 인상주의의 기원에 대한 또 다른 서사는 이러한 연구 성과들에서 도출된 몇 가지 추정에 기반한다.


존 리월드는 <인상주의의 역사>에서 르루아의 글을 상세하게 인용하며 인상주의가 시작부터 대중과 평단의 강한 비판에 직면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뒤이어 등장하는 작가들의 편지와 일기를 통해서 다각도로 드러난다. 절망, 낙담, 불안, 지지자들의 애처로운 격려가 여러 장에 걸쳐서 등장하며 이를 통해 전시의 참담한 실패와 이에 대한 반응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서사는 비슷한 이유로 큰 비난에 직면했던 1863년 마네의 작품과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리월드의 서술은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이 마네의 작품이 그러했듯 일방적인 비난을 받았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그가 인용한 수많은 1차 사료들이 증명하듯 인상주의 전시가 많은 비난에 직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비난을 가했던 주된 인물들은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뱅상의 사례에서 보듯 보수적인 성향의 작가,비평가들이었다. 1870년대 초 이들의 힘은 여전히 프랑스 예술계에서 주류였기 때문에 소위 진보적 작가로 분류되는 인물들이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인상주의에 대한 만평


하지만 작품에 대한 반응은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띄었다. <인상, 해돋이>가 당대에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었다는 점은 이를 보여준다. 모네의 작품은 출품 당시 비단 인상을 표현한 것을 넘어 주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주목을 받았다. 특히 보불전쟁의 패배 이후 프랑스의 재건이 주요 담론으로 부상하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르아브르 항구의 산업 크레인을 묘사한 모네의 작품은 국가의 경제적 재건이라는 함의를 내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당시 보수적 정치 성향을 지향했던 언론에서 모네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기도 했다. 물론 혹자는 작품 제작 당시를 회상한 1898년 모네의 인터뷰를 언급하며 이 작품이 르아브르라는 장소와는 큰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관람객들이 <인상, 해돋이>와 함께 전시된 <르아브르 항구>를 통해 작품의 장소적 특징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1870년대에 크레인의 존재는 르아브르 항구의 산업 활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설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관람객들이 이를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루이 르루아의 비평을 보수 = 인상주의 반대, 진보 = 인상주의 찬성이라는 도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인상주의 전시를 둘러싼 당대의 비평을 분석하면 전시에 대한 단순 정보전달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부정적인 의견이 그렇게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인상주의 전시에 대한 반응은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으며 관람자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따라 복합적인 양상을 띄었다는 것이다.


리월드가 르루아의 비평을 인용하며 보여주려고 했던 또 다른 지점은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인상주의에 관한 많은 서술에서 루이 르루아는 모네의 풍경화에 자극받아 인상주의라는 오명을 덧씌운 최초의 장본인이자 이 용어의 전파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묘사된다. 실제 리월드는 르루아의 기사가 프랑스 밖에까지 퍼져나갔다(p.222)고 말하며 이 기사의 영향력을 강조하고 있다. 한 가지 당혹스러운 것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기사가 나온 다음날 작품이 훼손될 것을 우려한 라투슈의 편지를 인용해 비평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연구에서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인물을 르루아가 아닌 쥘앙투안 카스타냐리(Jules-Antoine Castagnary)라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카스타냐리는 4월 29일의 비평에서 인상주의가 "풍경이 아닌 풍경이 낳은 감각을 묘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상주의라고 주장하며 작품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오늘날까지도 빈번히 인용되는 카스타냐리의 비평은 인상주의에 대한 더 없이 탁월한 설명으로 오늘날까지도 이 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설명으로 인용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기원과 관련하여 카스타냐리가 단지 작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유행을 카스타냐리와 연관시키는 사람들은 그가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 르루아가 사용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단순하다. 카스타냐리가 기고한 르 시에클(Le Siècle)이 르루아가 기고한 르 샤리바리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매체였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연구자들은 르 시에클이 르 샤리바리보다 훨씬 더 많은 구독자를 보유했으며(당시 르 샤리바리의 구독자 수는 2천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르 시에클은 4만명 정도의 구독자를 보유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발간된 매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점은 비록 르루아가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먼저 쓴 인물임에는 확실하지만 그것이 대중들에게 인식되는 과정에 있어서는 카스타냐리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의 부침을 회고한 일련의 글에서 르루아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가령 인상주의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정리를 시도한 구스타브 제프루아(Gustave Geffroy)의 책 <인상주의의 역사(Histoire de l’impressionnisme)>에서 르루아의 칼럼은 언급되지 않으며 모네 또한 1880년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탄생에 대해 회고하며 르 피가로(Le Figaro)에 실렸던 비평만을 기억할 뿐 르루아의 칼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실제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인상, 해돋이>를 둘러싼 당대 비평 중 르루아의 글을 언급한 경우가 2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처럼 19세기 내내 잊혔던 르루아가 다시금 역사에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에 들어서였다. 그를 다시금 인상주의의 역사에 위치시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인상주의의 오랜 옹호자였던 테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였다. 1906년 말년의 뒤레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역사(Histoire des peintres impressionnistes)>라는 책을 쓰면서 인상이라는 용어의 기원이 르루아의 비평에서 기원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인상주의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었던 1870년대에는 르루아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학자들은 1906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주목한다. 프랑스 예술에서 1906년은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이 시기 앙리 마티스는 <삶의 기쁨>이라는 작품을 통해 화단에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현대 예술로 가는 급진적 길을 닦았다.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이 선보인 강렬한 색채의 회화 작품들에 대한 비난은 오늘날 현대 미술의 전개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에서 야수파가 본래 부정적인 용어였다는 점은 현대 예술이 초창기에 겪게 되는 시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등장한다. 널리 알려졌듯 야수파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삶의 기쁨>이 살롱 도톤느에 전시된 이후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이란 비평가가 작품을 "야수에 둘러싸인 도나텔로와 같다"고 비난한 이후다. 그런데 이보다 덜 알려진 한 가지 사실은 보셀이 이 비평을 테오도르 뒤레에 대한 헌사로 썼다는 점이다. 이것은 뒤레가 인상주의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보셀의 비평에 영향받았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보셀이 뒤레에게 영향을 주었느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20세기 초 일부 예술가들이 야수, 입체와 같은 부정적 용어로 불리게 되었고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혁신과 센세이션을 보여주는 하나의 꼬리표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예술계에 소란을 일으키는 젊은 화가들에게 비평가들의 악담은 자신이 진보적인 예술을 추구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로 여겨졌으며 대중들 또한 이런 용어들이 새로움, 과거와의 단절을 추구한 급진적 인물들에게 부여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1870년대 당시 젊은 인상주의자들을 설명함에 있어 더없이 적절한 틀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르루아는 뒤레의 책에서 19세기의 루이 보셀로 다시금 인상주의 역사에 호출된 것이다.


20세기 인상주의 연구에서 뒤레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가 동시대에 인상주의자들과 깊은 친분을 나눈 조언자이자 운동의 주된 옹호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쓴 책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했다. 사료 비판 과정 없이 받아들여진 뒤레의 책은 20세기 내내 많은 연구서에 인용되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탄생 신화를 정식화했다. 1946년 리월드가 르루아의 비평을 상세히 인용한 것 또한 뒤레의 저서에서부터 내려온 오랜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19세기 말 미술 상황에 대한 여러 연구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전제들에 균열을 내며 당대의 역사상에 대한 재복원을 시도했다. 인상주의에 대한 기원 설화 또한 이 과정에서 신화가 아닌 19세기 프랑스 예술계의 맥락 속에서 재평가되었다.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탄생 과정이 20세기 초 인상주의를 역사적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다소간 왜곡되었으며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한 비평가의 고약한 악평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묘사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1860년대의 치열한 논쟁 과정 속에서 등장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면 이 논쟁은 무엇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인상주의라는 용어 탄생에 기여했는가? 이를 위해서는 시간을 다시 과거로 돌려 1860년대의 예술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살롱 전시는 자유화와 함께 풍경화의 약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와중에 하나의 단어가 떠오르는데 그것이 바로 인상이라는 용어였다.




분량 조절 실패로 인해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ㅠ 2편은 다소 짧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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