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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an 25. 2022

인상주의란 말은 오명이었는가 (2)

'인상'의 복잡한 정의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첫번째 인상주의 전시에 관한 비평들에서 주목할 점은 비평가들이 인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시를 본 비평가들은 서로 합의한 것이 없고 심지어 그 성향까지도 달랐지만 출품작들이 인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이것은 1870년대 초의 시점에서 인상이라는 용어가 이미 프랑스 예술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1860년대 샤를 프랑수와 도비니(Charles-François Daubigny)로 대표되는 바르비종파 회화와 바르톨드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와 같이 바다 풍경에 집중했던 화가들을 비평할 때 인상이라는 용어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했다.


하지만 그 용례를 따져보았을 때 1860년대 인상 개념이 두 가지 혼재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상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정의는 물론 대기 효과와 연관된다. 이것은 인상을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의 속성(요컨대 대기의 효과나 빛의 효과)과 연관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평자들은 인상을 스케치풍의 회화와 동일시했다. 이들에게 인상은 작품의 제작 과정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인상은 누군가에게 대상이 드러내는 특질이었지만 누군가에겐 화폭에 표현된 기교를 의미했다. 인상이라는 용어가 오늘날의 정의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마네의 회화를 분석할 때 등장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마네의 작품에서 인상이 나타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빛, 대기를 포착한 효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인상은 마무리가 안된 것처럼 보여 마치 처음 칠한 것과 같은 스케치풍의 화면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비판자들이 인상이라는 용어를 동원했을 때 그것은 작품 제작 상의 절차 문제를 걸고넘어진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인상이라는 용어의 두 가지 정의는 오늘날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인상을 표현한 대표적 회화인 인상주의가 빛, 대기의 효과를 스케치풍의 기법으로 표현한 회화이기 때문에 두 정의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 속에 놓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당대의 비평가들에게 이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켰다는 점은 혼란으로 다가왔다. 인상에 대한 정의를 빛, 대기 효과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인상주의 회화는 그러한 효과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버린 미완성작으로 보였다. 1860년대 인상이 바르비종파와 같은 비교적 마무리가 잘되고 세심한 붓질로 세부를 표현한 회화 작품을 비평할 때 적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인상주의 작품은 그것에는 한참이나 못 미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한편 인상을 기법의 문제로 파악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작품이 미완성에 가까운 무엇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미완성이라 생각한 것은 효과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단지 스케치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마네 작품에 대해서 보수적인 비평가들이 단지 "인상"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며 완성작이 아니라고 비판한 것처럼 인상주의자들 또한 단지 인상에만 머물렀을 뿐 그것을 작품으로 완성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요약하면 인상의 두 가지 정의는 인상주의에 대한 서로 다른 비평을 낳았다. 그들에게 인상주의 작품은 마무리가 덜 된 회화라는 점에서 의견 일치를 보였지만 한쪽에서는 효과의 미완성을 지적한 반면 다른 한쪽은 작품의 미완성을 지적하며 인상주의 회화를 비판했다. 이렇듯 인상에 대한 두 정의가 모두 인상주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뒷받침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회화의 옹호자들은 두 정의를 하나의 논리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작품에 대한 긍정적 비평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판자나 옹호자 모두 인상이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부정적 평가를 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단지 인상을 불충분하게 전달했거나 혹은 인상만을 전달했기 때문에 작품에 부정적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요컨대 인상 그 자체는 최소한 당대 비평가들에게 문제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은 인상주의를 비평에 있어 논쟁의 중심이었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 이를 정의하는 두 방식 사이에서 비평가들이 혼란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혼란은 1870년대 인상주의 전시가 개최되었던 내내 지속되었다. 인상주의자들이 그들 스스로를 인상주의자로 지칭하고 전시 제목에 그 용어를 전면에 내세웠을 때 조차도 그것의 정의는 명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품의 창작자들이 이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평가들의 논쟁은 더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스타냐리의 주장은 인상주의 옹호자들에게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다가왔다. 앞서 언급했듯 카스타냐리는 인상주의 회화가 "풍경이 아닌 풍경이 낳은 감각을 묘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상주의라 정의한 바 있다. 카스타냐리는 이를 발전시켜 풍경이 낳은 감각이 평면적 묘사 방식과 색채 사용, 자유로운 붓질과 같은 표현 수단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카스타냐리가 인상의 두 번째 정의를 어떠한 방식으로 첫 번째와 연결시켰는가에 있다. 인상에 관한 두 번째 정의에 따르면 스케치 기법의 사용은 배경지식이나 기타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왜곡되기 이전에 빠르게 인상을 기록한다는 측면에서 그것의 본래 정의에 부합했다. 하지만 카스타냐리는 이러한 인상의 순간성을 포기했거나 혹은 애써 무시했다. 대신에 그는 인상주의자들의 기법이 객관적인 기록 행위가 아닌 주관적 표현 행위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한다. 풍경이 아닌 풍경이 낳은 감각을 묘사한다는 것이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인상이 내포한 다른 측면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인상에 대한 정의에서 스케치를 언급한 것은 이를 발현하는 주체가 예술가가 아닌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상은 분명 객관적인 실재로 존재하는 무엇이다. 예술가가 할 일은 그러한 인상을 재빠르게 포착하여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빠르게 캔버스에 담아내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카스타냐리의 정의에서 이러한 측면은 축소된다. 더구나 카스타냐리의 정의에 따르면 인상주의는 주관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자와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1877년 폴 만츠(Paul Mantz)가 인상주의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정리를 시도할 때 뛰어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카스타냐리의 주장이 주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여겼다. 이에 그는 기존의 주장을 약간 비틀어 인상이 본래 내포하고 있었던 객관적 성격을 다른 방식으로 복구하고자 했다. 그는 인상이 "경험된" 인상으로 존재할 때만이 형상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 대상에 대한 형상화는 단순히 스케치풍이 아니라 예술가가 인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여겨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뤄진다. 이러한 정의는 모네로 대표되는 풍경화 이외에도 인상주의와 형식적으로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일군의 회화들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적합한 틀을 제공했다. 요컨대 기법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며 꼭 스케치라는 한정된 기법에 매몰될 필요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했던 것은 인상이 하나의 객관적 실체가 아니고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양자가 결합된 무엇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시기 비평가들에게 주관적인 것은 단순히 객관적인 것의 반대항이 아니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주관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객관적인 것이었다. 인상 또한 마찬가지다. 인상은 분명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에게서 나오는 무엇이라는 점에서 객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지각하고 이를 예술가가 자신만의 수단을 활용해 진심으로 묘사하는 과정은 객관적인 무엇을 주관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비평가들에게 이러한 행위 또한 대상이 본래 가지고 있던 인상을 그대로 구현한 것과 같았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재빨리 붓을 놀려야 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내가 어떻게 묘사하냐에 있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비평가들에게 있어 인상주의가 단지 주관적 감각의 표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물이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론적으로 인상주의자들의 회화는 객관적인 인상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인상주의는 객관적 인상을 표현한 주관적 회화였다.


인상을 둘러싼 복잡한 정의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평가들이 내놓은 여러 제안들은 당대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인상주의가 운동으로의 생명력을 상실한 1880년대 이후 그것의 정의는 다시 주관과 객관 양 극단의 문제를 골몰하는 단계로 회귀했다. 이 과정에서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가 낭만주의적 주관성으로 빠져들었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시기에 따라 상이했다. 가령 20세기 초 영국의 비평가 로저 프라이는 인상주의가 지나칠 정도의 과학적 객관성 때문에 예술이 가진 특유의 생명력을 잃어버렸다고 평가했다. 20세기 후반까지 인상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는 복잡한 난제로 남아있었다. 인상주의를 정치, 사회적으로 재조명하고 그것의 형식적 특징들이 복원 기술의 도움을 받아 세세하게 규명되는 와중에도 인상의 본래 의미를 둘러싼 이론적 논쟁은 미답으로 남았다. 이 시기 인상은 단지 루이 르루아의 악명 높은 비평과 함께 새로운 회화에 대한 보수적 관람자들의 반발을 설명하는 상징적 개념으로 이용될 뿐이었다. 인상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탐구된 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1860-70년대 프랑스 예술 비평의 논쟁들이 심도 깊게 연구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그들이 전개했던 이론적인 논증들이 연구되기 시작하자 인상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 또한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도출된 몇 가지 답은 비록 오늘날의 관람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사변적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성과 속에서 인상주의는 보다 더 풍부한 함의를 얻게되었다. 일례로 리처드 시프는 인상주의자들에게 있어 인상이 후기실증주의 철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그는 인상주의가 단지 주관과 객관으로 양분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의 측면을 하나로 결합한 무엇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리처드 브레텔은 인상주의의 기법적인 측면을 연구에 시프의 주장이 실제 작품에서도 정교하게 구현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구 성과 속에서 인상은 단지 부정적인 용어가 아닌 복잡한 함의를 가진 예술 용어로 다시금 재조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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