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파리의 교외와 인상주의
1871년, 클로드 모네는 파리 서쪽 교외의 아르장퇴유에 정착한다. 1870년 이후 프랑스에 불어닥친 전쟁과 내전을 피해 피해 영국과 네덜란드를 전전하던 와중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 여러 곳을 떠돌던 모네였지만 이곳을 선택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몇 년 전 그는 이곳에서 오귀스트 르느와르와 함께 여러점의 작품을 그렸고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네 화풍의 상당 부분을 확립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아르장퇴유 주변에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기에 사회적 교류를 도모하기에도 좋았다. 후일 인상주의자들로 불리게될 일군의 화가들부터 평론가, 작가, 언론인까지 그의 인맥들이 도처에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장퇴유는 일찍부터 파리 부르주아들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1848년을 전후로 하여 교외 지역은 파리의 팽창으로 말미암아 성장의 혜택을 보았고 그 결과 1870년대에 들어서면 도시에 갑갑함을 피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해 외지인과 현지인의 구분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매해 살롱 전시에서 실패의 쓴맛을 맛보았던 모네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향이 조금 달랐다. 제2제국 시절 모네가 기존의 미술에 저항하던 방식은 요약하면 "그들의 영역 안에서 싸우기"였다. 그는 끊임없이 공식 전시인 살롱의 문을 두드렸다. 결과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심사위원들의 입장에서 이 젊은 화가의 작품은 어딘가 붓질이 성글고 마무리는 형편이 없으며 주제 또한 속물적이기 그지 없었다. 마치 모네의 반항을 반면교사라도 삼으려는 마냥 그의 회화는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러자 모네는 방법을 조금 바꾸어 청원서를 넣는 형식으로 기존 규칙의 변화를 도모하려고 했다. 유명한 인상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는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마네. 쿠르베와 같은 인물들이 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이 운동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체제에 어느 정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심사의 기준이 다소 변화했고 비교적 자유로운 화풍을 추구했던 화가들도 살롱에 입성하는 것이 쉬워졌다. 하지만 빗장이 조금 열렸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보불 전쟁이 터졌고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살롱의 엄격함은 줄어들기는 커녕 더욱 심해졌다. 1872년 예술성 장관인 샤를 블랑은 살롱에서의 자유화가 제2제국의 타락과 방종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무자비한 심사 기준이 살롱전에 도입되고 화가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샤를 블랑의 머리 속에는 오직 역사화만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출품한 작품이 미켈란젤로, 푸생과 같은 과거 거장의 역사화와 얼마만큼 부합하느냐에 있었지 혁신에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역사화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은 가차없이 퇴짜를 맞았다. 이제 혁신을 외치던 화가들은 살롱의 체제 안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들만의 독립전을 열고 아무런 규제 없이 마음껏 작품을 전시하자! 이 생각은 처음에는 단지 음침한 카페의 테이블 한 구석에서 젊은 화가들이 늘어놓는 푸념에 불과했다. 하지만 1870년을 기점으로 이러한 몽상은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다.
모네는 아르장퇴유에서 1871년부터 1878년까지 약 8년간 머무른다. 그리고 이 시기는 프랑스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근 300년 가까이 헤게모니를 유지했던 살롱전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약화되며 그 결과 독립전이라는 새로운 경향이 새로운 미술 사조들을 휘어잡는다.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때도 바로 이 시기다. 비록 인상주의자들의 실험은 당대에는 그렇게 많은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앞으로 20세기 초반을 규정하는 여러 미술이론들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기원을 이 시기로 설정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과 긴장과는 반대로 모네 자신이 그렸던 교외 지역의 풍경은 지극히 즐겁고 또 평안했다. 그것은 그가 보트놀이, 야유회, 산책과 같은 부르주아들의 휴가 풍경을 즐겨 그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 교외 활동을 주제로 하는 모네의 풍경화는 보수적인 화가, 비평가들이 보기에 아주 도발적이었으며 심지어는 전복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유희, 평안을 주된 테마로 잡고 있는 회화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아주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러한 위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네, 르느와르, 모리조, 피사로와 같은 인상주의자들이 그렸던 교외 풍경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삶의 기쁨, 휴식의 즐거움, 친구들과의 파티 풍경, 여유로운 산책과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지친 삶을 떠나 강, 바다 그리고 산으로 떠나는 현대인들처럼 그 시절 사람들도 더위 혹은 추위를 피해 도시를 벗어나 휴가를 떠났다는 사실뿐이다. 어쩌면 여기에 더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다 똑같구나"라는 말 한마디 정도를 더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적어도 학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시기를 면밀하게 연구했던 선학들은 인상주의 회화에서 그 시대의 날카로운 편린을 읽어내곤 했다. 그들은 교외 풍경화에서 새로운 장르의 탄생, 보수적 미술의 변화와 같은 예술사적 전환부터 도시화, 부르주아 문화의 양상 그리고 특정 계층이 다른 계층에게 퍼부어대는 온갖 종류의 배제, 격리 메커니즘과 같은 사회적 측면까지 읽어내곤 했다. 본 글은 바로 이러한 노력이 담긴 몇 권의 책들을 참고해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