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Eik Kahng, L'Affaire Greuze and the Sublime of History Painting, The Art Bulletin, vol. 86, 2004.(그뢰즈 사건과 역사화의 숭고)
1760년대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에게 있어 장바티스트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1725-1806)는 화려함에 매몰된 프랑스 미술계에서 희망과도 같았다. 그들은 장식성에 몰두한 채 쾌감만을 제공한 로코코 미술과 다르게 그뢰즈의 작품이 사회적 소명감을 가지고 있으며 감상자의 감각이 아닌 양심에 호소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뢰즈에 대한 지지는 1769년의 한 사건으로 크게 변화한다. 1769년 그는 아카데미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1769)를 제출한다. 작품은 로마 제정 시기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아들 카라칼라를 꾸짖는 일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당시 그뢰즈는 프랑스 내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장르화가라는 꼬리표를 벗어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최고의 영예를 누리던 역사화가로의 도약을 꿈꿨다. 하지만 고대 로마 역사를 소재로 한 그뢰즈의 작품은 냉혹한 평가를 받았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그의 작품을 장르화로 취급했고 작품의 평가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이뤄졌다. 이 시기 그뢰즈가 프랑스에서 가지고 있었던 인기가 무색하게 아카데미 제출작은 화가에게 큰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자신을 옹호했던 계몽주의자들 또한 작품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 즉 그뢰즈의 실패는 진보적인 화가와 완고한 보수주의자들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 실패한 것이었다. "그뢰즈 사건"으로 알려진 1769년 살롱에서의 실패는 화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 사건 이후 다음 세기가 오기까지 그가 아카데미에 작품을 제출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뢰즈 사건이 일어나고 150년이 지난 오늘날의 고지에서 학자들은 그뢰즈의 역사화에서 선구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특히 그는 바로 뒷 세대인 자크루이 다비드가 보여준 역사화와 장르화의 혼종 경향을 한 발 앞서 선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 다비드와 그뢰즈의 역사화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고전적 분위기를 강조하는 건축 배경, 전반적으로 어두운 채도, 색채가 아닌 선을 강조한 인물 묘사, 단순한 구성 속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된 인물의 동작, 연극 무대와 같은 인물들의 행동과 부조처럼 묘사된 얕은 공간감 등. 이러한 공통점을 하나하나 열거해보면 그뢰즈가 다비드의 업적을 선취한 선구자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1769년 그뢰즈의 야심 찬 역사화는 왜 혹평을 들었을까?
비록 현대의 학자들이 그뢰즈의 역사화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당대에 억울한 오해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가령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기묘한 손동작은 지금까지도 큰 단점으로 지적된다. 이런 측면은 유사한 동작을 보이고 있는 다비드의 작품 <구걸하는 벨리사리우스>(1781)와의 비교를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셉티미우스> 속 침대에 누워있는 인물의 팔 동작이 왼쪽의 인물을 꾸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르고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반면 <벨리사리우스> 속 주인공의 동작은 구걸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런 차이는 어느 정도 그뢰즈 본인이 자초한 것이기도 한데 그가 묘사한 사건이 회화로 그리기에는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다. 17세기이래 화가, 이론가들은 고전고대의 이야기라도 회화에 적합한 주제와 그렇지 않은 주제가 나뉘어 있다고 보았다. 가령 시각 언어인 회화는 대화를 통해서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매체라고 보았다. 그런 장면은 연극 장르에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회화 장르에서는 감상자의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뢰즈가 아들을 꾸짖는 로마 황제의 일화를 작품의 장면으로 선택한 순간 평론가와 동료 화가들의 비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화가의 미숙함을 지적하거나 역사화의 규범을 위반했다고 평가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18세기 화가들에게 있어 역사화는 과거에 존재했던 위대한 화가들의 전범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기 프랑스 화가들에게 있어 그 위대한 화가는 다름 아닌 니콜라 푸생이었다. 동시대 역사화가를 지망했던 많은 화가들처럼 그뢰즈 또한 푸생이 이룩했던 성취와 이를 해석했던 후대 화가, 이론가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뢰즈의 패착은 푸생의 성취를 연극에서의 심리적 동일시 혹은 감정이입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맥락을 알아야 한다. 첫째, 18세기 푸생에 대한 평가. 둘째, 연극 분야에서의 심리적 동일시를 그뢰즈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구현했는가에 대한 문제다.
널리 알려져 있듯, 푸생은 17-18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의 규범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가 이룩한 고전주의는 후대 화가, 이론가들에게 다양하게 해석되었으며 그것은 다비드라는 특이점이 푸생보다 더 푸생스러운 그림(때문에 『서양미술사』의 저자 잰슨은 그의 저서에서 다비드와 그뢰즈를 묶어 후기 푸생주의자로 보기도 했다)을 만들기 전까지 역사화의 전거를 이뤘다. 그런데 푸생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긍정 일변도긴 했지만 시기에 따라서 그 결이 달랐다. 그뢰즈가 활동하는 시대는 그러한 변화로 푸생의 작품들이 다른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었다.
먼저 푸생에 대한 초기의 평가를 알아보자. 17세기 푸생의 강력한 옹호자 중 한 명인 샤를 르 브룅은 푸생의 회화가 숭고함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사례로 <사막에서 하늘의 선물 만나를 받는 이스라엘인들 Manna of gathering>(1639)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희곡에서 이야기는 작품의 전체 주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시작, 중간, 끝이 있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회화는 관객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인물들을 묘사함에 있어 화면 속 상황 이전에 했던 행동들도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푸생이 그의 작품에서 한 일이다. 이 작품에서 관람자들은 유대인들이 도움을 받기 전 겪었던 굶주림과 고통을 볼 수 있다.
르 브룅은 푸생의 작품을 평가함에 있어 작품이 제공하는 내러티브 전체를 작품 속에서 얼마나 읽어낼 수 있는가를 중요한 지표로 삼았다. 희곡에서 시작, 전개, 마무리 어느 하나라도 놓치게 되면 주제를 이해할 수 없듯 그림 속 인물들이 어떠한 맥락을 거쳐 화면 속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 제시해야 하며 그럴 때만이 작품의 숭고함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18세기에 들어 그림 속 인물은 단순히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 시기 푸생 작품이 가진 숭고함은 단순한 구성과 인물에 대한 명확한 묘사를 통해 관객이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때 느껴진다고 보았다. 당대에 푸생의 대표적 작품으로 여겨진 <에우다미다스의 유언 The Testament of Eudamidas>(1644-1648)에 대한 한 비평가의 감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병약함이 단지 슬픈 위안에 불과한 그 순간, 다정다감한 어머니는 그녀의 희망이었던 소중한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젊은 여성은 자신에게 삶과 교육, 보살핌을 주었던 존재인 아버지를 잃는다. 남자는 아무 희망도 없고 두려움에 가득 찬 이 세상에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에우미다스의 유언>에서 주목받는 것은 유언의 내용도, 어떤 과정을 거쳐 남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아니다. 핵심은 각 인물들이 가진 비탄의 감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했느냐에 있다. 이런 해석에 근거했을 때 이야기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오히려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구체성은 이야기의 전개가 아닌 각 인물들의 감정 표현에 나타나야 했다. 문제는 이런 관점이 역사화가 가진 본질적 의의를 희석한다는 것이다. 역사화가 회화 장르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은 그것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 이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역사화는 관념을 시각화한 작품이었다.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가 외양을 묘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역사화는 성경, 신화, 역사를 양분 삼아 초월적인 의미를 전달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장르화가 바깥 세계에 대한 모방이라면 역사화는 화가의 지성과 상상력에 대한 모방이어야 했다. 플라톤식으로 요약하면, 역사화는 동굴에 비친 그림자가 아닌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아였으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외양의 모방에만 머무르는 장인들과 구분되었다.
역사화가 가진 의미를 곱씹어보면 18세기 푸생에 대한 평가에 어떤 위험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18세기 푸생의 작품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이유는 화면에 묘사된 인물들이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정이입을 위해 동원된 묘사의 정확성은 그림이 초월적인 관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외양의 모방에 치중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었다. 쉽게 말해 푸생에 대한 평가 방식은 역사화와 장르화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뢰즈가 역사화 제작에 착수했을 때 직면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요컨대 이 시기 그뢰즈가 직면했던 모순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역사화를 그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역사화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푸생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역사화 속 인물들의 상세한 묘사를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따를 경우 역사화는 장르화로 인식될 소지가 다분했다. 이 교착상태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그뢰즈의 해답은 다른 매체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에 있었다. 그는 문학 매체의 논의를 끌어들여 숭고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이때 그뢰즈가 참고한 것은 문학에서의 숭고 논의였다. 당시 숭고 개념은 1674년 니콜라 부알로(Nicolas Boileau-Despréaux)가 고대 그리스 수사학자 롱기누스의 책 『숭고에 관하여 On the Sublime』를 번역한 이후 중요한 미학적 개념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시기 숭고 논의에 있어 롱기누스의 숭고 개념은 번역자 부알로의 해석을 거친 숭고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책의 서문에서 부알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롱기노스는 수사학자들이 숭고한 문체라고 불렀던 것을 숭고로 이해하지 않았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것은 작품이 [독자를] 고양시키고, 황홀하게 하고, 열광시키는 특별하고 경이로운 것이다. 숭고한 문체는 언제나 거대한 단어들을 원하지만, 숭고는 단 하나의 사유, 단 하나의 수사, 단 하나의 말의 문체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어떤 것이 숭고한 문체에 속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숭고는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특별한 것도 놀라게 하는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자연의 최고의 주권자는 단 한마디 말로 빛을 만들었다.” 그것은 숭고한 문체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결코 숭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강렬한 경이로운 어떤 것도 없고, 우리가 [경이로운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 빛이 있으라 말하니, 빛이 있었다.” 창조주의 명령에 대한 피조물의 복종을 매우 잘 드러내고 있는 이 표현의 특별한 문체는 참으로 숭고하고 신성한 어떤 것을 가진다. 그러므로 롱기노스의 숭고를 통해서 특별한 것, 놀라게 하는 것, 그리고 내가 번역한 것과 같이 담화에서의 경이로운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숭고한 문체와 숭고를 구분한 부알로의 해석에서 숭고는 과장되고 장대한 표현으로 특징지어지는 숭고한 문체일 필요가 없었다. 무미건조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단 몇 마디를 통해서 숭고를 표현할 수도 있었다. 이때 부알로는 숭고한 것과 아닌 것을 판단하는 잣대를 문구를 읽는 독자에게로 돌린다. 장대한 수사, 거대한 존재에 대한 묘사가 아닌 읽는이가 강렬한 감정 느꼈다면 그 문구는 숭고를 표현한 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강렬한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부알로는 이에 대해 부연하며 강렬한 감정은 경이로움, 전율의 감정이라 말했다. 그런데 1765년 백과전서의 편찬 과정에서 숭고 파트를 집필한 슈발리에 드 조쿠르(Chevalier de Jaucourt)는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코르네이유의 희곡 <메데>에서 유모 네린이 격앙된 메데에게 충고하는 장면을 인용하며 숭고로 인한 강렬한 감정이 무엇인지 부연설명한다.
네린
이렇게 혹독한 환경에서 마님께 남은 것인 무엇이에요?
메데
나(Moi),
내가 남아있어, 그것으로 충분해.
이 짧은 대화에 대해 조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Moi), 내가 남아있어, 그것으로 충분해.'
메데아의 이 대사 외에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용기와 기쁨을 보았고 그녀의 추악함은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되기 시작했고 그녀에 대해 생각하며 그녀와 함께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숭고다.
조쿠르에게 숭고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을 넘어 인물의 상황에 몰입하고 인물의 감정, 더 정확히는 분노, 슬픔, 절망과 같은 극적인 감정과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숭고는 대상과 관람자의 경계가 해체되고 둘 사이의 감정적 동일시를 이뤄낼 수 있는 문장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백과전서의 숭고 항목에 대한 해석은 그뢰즈가 선택한 장면이 단순히 미숙함이라던가 역사화의 규범 위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뢰즈는 숭고에 대한 문학적 개념을 빌려와 교착상태에 빠진 역사화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은 회화에 대한 당대의 관념들과 결합했을 때 여전히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끝내 그뢰즈는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실패를 맛보았다. 그것은 바로 회화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회화에서 표현 가능한 것은 오로지 동작과 표정뿐이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그뢰즈의 노력은 유화스케치와 최종 작품을 비교할 때 드러난다.
스케치에서 그뢰즈는 누워있는 황제와 카라칼라를 비교적 가깝게 배치해 마치 셉티미우스가 카라칼라를 꾸짖는 장면을 연출했다. 또한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손을 입에 물고 있는 카라칼라의 모습은 이러한 점을 재확인시켜준다. 그런데 완성본에서 이 둘의 거리는 더 멀어졌으며 카라칼라의 손 또한 아래로 내려갔다. 이로 인해 황제가 아들을 꾸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분노에 찬 모습으로 침묵을 유지한 채 아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런 모호함은 스케치에서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떼고 있던 셉티미우스의 모습이 완성본에 와서는 입술을 굳게 닫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 것에서 더욱 배가된다. 하지만 이 모호함 혹은 굳게 닫힌 황제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그 침묵이야말로 그뢰즈가 숭고를 흘려보낸 통로다. 전시 캡션에서 그뢰즈는 이 작품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네가 나를 죽이고 싶다면 파피니안(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이 칼로 나를 죽이라고 명령해라!" 그뢰즈가 제시한 이 장면에 대한 해설에서 본래의 이야기가 가진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생략된다. 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는지, 황제의 꾸짖음을 들은 아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황제의 일갈에 주변의 인물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등등. 짧고 강렬한 일갈 뒤에 이어지는 침묵. 그것이 메데의 짧은 대사가 동일시를 일으킨 것처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라는 인물에게 관객이 동일시를 일으킬 수 있는 순간이라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모호한 침묵을 대체하는 모호한 동작은 문학의 침묵과 같은 감정이입을 유발하지 못했다. 시각적 모호함은 침묵과 그 성격이 달랐다. 침묵은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모호함은 단지 갈피를 못잡은 아마추어의 표상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었으며 실제 작품에 대한 비평은 이러한 반응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푸생 회화에서 나타난 감정적 동일시와 희곡 속 짧은 대화를 통해 느껴지는 숭고는 그뢰즈의 회화에서 섞이지 못한 채 관람객들의 부정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감정이입이라는 목적 달성에 실패한 회화는 앞서 언급한 비평들에서 알 수 있듯 미숙함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뢰즈의 문제의식은 분명 옳았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작품의 미숙함만큼이나 미숙한 실험에 불과했다. 역사화와 장르화의 결합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약 20년 뒤 다비드가 프랑스 예술계에 데뷔하기 전까지 논쟁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c.f) 부알로의 서문 해석은 정다영, 「근대 숭고개념의 재발견: 니콜라스 부알로를 중심으로」, 『철학연구회』 vol. 128, 2020, pp.73-74.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