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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l 06. 2023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왜 파격적인가

표정에서 몸짓으로의 변화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6, 캔버스에 유채, 톨레도 미술관


원문 : Dorothy Johnson, <Corporality and Communication: The Gestural Revolution of Diderot, David, and The Oath of the Horatii>, The Art Bulletin, 1989 
(육체와 의사소통: 디드로,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의 제스처 혁명)  


다비드 작품 이해에 있어 혁명과 계몽주의라는 단어는 친절한 안내자임과 동시에 사악한 악마다. 특히 혁명 이전 작품들을 독해함에 있어 두 개념어는 그것이 가진 맥락이 소거된 채 다비드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준거로 등장하곤 한다. 문제는 이러한 논지 속에서 다비드는 계몽주의에 동조하여 혁명을 예견한 18세기의 오라클처럼 다뤄진다는 것이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를 둘러싼 여러 독해들은 그러한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혁명 이전 다비드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회화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작품의 탄생 과정과 관람자들의 반응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비드는 1782년 왕실 주문을 받은 이후 1784년 초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고 이듬해 7월 완성해 로마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처음 작품을 공개했다.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1785년 프랑스 살롱에 작품이 걸렸을 때는 수많은 인파가 작품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을 정도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처럼 다비드의 작품은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여기에는 좁힐 수 없는 시간적 간격으로 인한 해석의 차이가 있다. 오늘날 이 작품이 후일 다가올 혁명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독해되는 것과 달리 작업이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동시대 작가들과의 형식적인 차이라는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도로시 존슨(Dorothy Johnson)의 글 <육체와 의사소통: 디드로,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의 제스처 혁명 Corporality and Communication: The Gestural Revolution of Diderot, David, and The Oath of the Horatii>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이러한 형식적 문제에 관한 핵심 질문을 직접적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품의 탄생 배경을 분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것이 프랑스 화단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추적한다. 글의 행간 속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왜 혁신적인가? 그것은 다비드의 작품이 얼굴 표현에서 신체 표현으로의 이행이라는 인체 묘사 방식의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샤를 르 브룅, <아카데미 강연을 위한 도판, 공포와 슬픔>, 1668, 펜과 검은잉크, 루브르 박물관


인물 표현에 있어 얼굴을 중요시하는 관행은 아카데미가 성립한 이래 오랫동안 중요한 원칙으로 여겨졌었다. 이러한 원칙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은 왕립 미술 조각 아카데미의 설립자인 샤를 르 브룅이었다. 그는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표현에 대한 강연 Conférence sur l'expression générale et particulière」(1689)에서 인간 감정을 묘사함에 있어 얼굴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르 브룅은 아카데미 강연에서 정념에 관한 이론을 개진하며 육체-정신의 이원론에 기반한 감정 표현 방법을 주장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물질과 영혼의 결합으로 구현되며 이 둘은 인간의 혈액 속에 내재한 동물 영혼 혹은 동물 정기(esprits animaux)를 통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때 인간의 표정은 동물 정기의 영향을 받은 근육의 움직임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며 이 근육의 움직임으로 인한 변화가 정념의 시각적 표현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의 얼굴 표정을 그리는 것은 단순히 외양 넘어 그 너머에 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리는 것과 관련이 있었으며 그것이 대상에 대한 본질적 묘사였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영향을 받은 르 브룅의 정념 이론과 그것의 표현 방식은 18세기 중반까지 인물 묘사의 미학적, 교육적 원칙으로 장려되고 있었다. 그리고 1770년대에 이르러 미술 비평이란 장르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얼굴 표정은 인물 묘사, 나아가서는 작품 수준을 평가함에 있어 핵심적 요소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인체 표현에 주목한 비평들은 있었으나 이 경우에도 신체 동작은 얼굴 표정을 보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디드로의 비평은 이질적인 예외였다. 그는 판토마임에 대한 관심으로 말미암아 신체 구조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당대의 비평가, 예술가들과 다르게 감정 표현에 있어 신체가 얼굴 표정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 얼굴이 신체 표현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1765년 디드로의 살롱 비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디드로는 장바티스트 그뢰즈(Jean-Baptiste Greuze)의 작품 <배은망덕한 아들>(1778)과 <벌 받는 아들>(1781)을 비평하며 손발의 위치와 자세 등의 신체 표현이 캐릭터의 성격과 가족관계를 드러낸다고 보았다. 물론 신체 표현을 강조한 디드로의 비평이 완전히 순수한 창작은 아니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인류학, 언어학, 교육학 분야에서는 판토마임의 기원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에서 비언어적 소통 수단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된 상태였다. 또 연극과 무용 분야에서도 판토마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 또한 바디랭귀지를 비롯한 비언어적 소통 수단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그것이 문화적, 언어적 차이를 극복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신체 표현에 주목한 것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디드로가 예외적 사례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다른 곳도 아닌 회화 분야에서 신체의 동작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르 브룅을 비롯한 아카데미 중심의 왕실 화가들이 세워놓은 얼굴 중심의 인체 표현은 당대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도 공고했고 그것은 적어도 1760년대에 등장한 많은 살롱 출품작들을 보았을 때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디드로는 그러한 규율을 정반대로 뒤집은 파격적 주장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는 연극 분야의 사례를 회화에서의 인체 표현에 적용해 신체 동작의 묘사가 단지 언어의 보조적 수단이 아닌 독립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라 보았다. 심지어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체 표현이 언어적 표현보다 더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수단이라고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디드로가 18세기말 프랑스 문화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판토마임에 대한 강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디드로는 자신의 살롱 비평에서 니콜라 푸생의 신체 표현을 칭찬하며 그의 표현 방식이 동시대 화가들이 추구해야 할 모범이라고 보았다. 가령 1767년과 1769년 살롱에서 디드로는 푸생의 작품 <에우다미다스의 유언>(1644-1648) 등을 상찬하며 이 작품에서 감정과 사상이 신체를 매개하여 표현되고 있다고 보았다. 요컨대 디드로에게 신체 표현의 강조는 단지 연극에서 강조되던 미덕을 회화 분야에까지 똑같이 적용하라는 주문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연극의 영향만큼이나 프랑스 고전주의에 속하는 거장들의 전거에 기댄 것이기도 했다.



장바티스트 그뢰즈, <셉티무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1769,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그러나 이 역시도 디드로 개인의 독특한 주장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판토마임에 대한 관심이 그러하였듯 푸생에 대한 관심은 비단 디드로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화단에서 푸생의 지위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빠르게 상승하였으며 이에 직접적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일련의 작품들은 거장의 회화를 기괴한 방식으로 모방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나 이들 작품에서 (푸생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 신체 표현은 과장된 몸짓과 복잡할 정도의 인물 구성, 옅은 윤곽선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디드로 또한 푸생의 영향을 받은 이 회화 작품들이 어색한 비율과 불분명한 자세, 과잉에 가까운 구성 등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비판했다. 일례로 디드로는 역사화가의 야망을 품고 그뢰즈가 제출한 <셉티무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1769)를 두고 모호하게 표현된 신체 표현으로 주인공이 으레 가져야 할 힘과 권력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좌) 노엘 알레, <트라야누스의 재판>, 1765, 마르세유 미술관//(우) 자크루이 다비드,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 1783, 루브르 박물관


그러한 상황에서 1780년대 다비드의 등장은 프랑스 화단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다비드의 사례를 통해 비평가들은 신체 동작을 작품의 주제와 인물의 감정상태를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이전 시기 회화들과 달리 다비드의 작품이 과거의 인물 묘사 방식과 절연하고 새로운 형식적 실험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가령 <구걸하는 벨리사리우스>(1781)에서 비평가들이 주목한 것은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두 인물의 팔이었다 특히 벨리사리우스의 팔 동작은 구걸이라는 작품의 내러티브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장군에서 구걸하는 존재로 전락한 벨리사리우스의 감정적 상태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장치다. 또한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1783)에 대해서도 가로축이 강조된 헥토르의 신체와 세로축이 강조된 안드로마케의 신체 묘사, 두 인물의 중첩된 팔을 통해 삶과 죽음의 대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두드러진 것은 화면의 단순성이었다. 1780년대 다비드는 소수의 인물들을 마치 조각과 같이 분명한 윤곽선으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과거 푸생의 전거를 따라 신체 표현을 도입했던 여러 화가들은 신체 동작 표현에 있어 모호함과 과장이라는 양 극단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가령 디드로는 노엘 알레(Noël Hallé)의 작품 <트라야누스의 재판>(1765)을 평하며 "팔은 뻣뻣하고 손과 엄지는 부정확하다"고 평했다. 이러한 비평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디드로가 팔, 다리와 같은 사지 표현을 신체 표현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그뢰즈의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기묘하게 표현된 셉티무스의 팔 표현을 비판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각과 같은 명료함과 단순함으로 특징지어지는 다비드의 회화는 과도한 시각적 정보를 최대한 억제하고 인물의 동작 그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를 관객들이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도록 했다. 이전 작품들과 비교되는 가장 큰 특징이었다.



자크루이 다비드, <영웅의 장례식>, 1778, 크로커 미술관


이처럼 비평가들의 변화를 이끌어낸 다비드였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러한 회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커리어 초반 로코코풍 회화를 주로 그렸으며 로마상을 받을 당시에도 그러한 화풍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회화가 크게 변화한 것은 1775년 로마에 온 이후였다. 당시 로마는 고전고대의 조각 작품을 연구하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군의 예술가, 문필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분명한 윤곽선을 토대로 하는 데생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다비드의 예술에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런 변화는 로마 체류 당시 다비드가 완성한 작품인 <영웅의 장례식>(1778)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 작품이 과거 분명하게 단절하는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슬픔과 비탄을 얼굴 표정이 아닌 인물의 포즈로 드러냈다는 점일 것이다. 부조와 같이 묘사된 인물 군집 속에서 슬픔의 감정은 분명하게 표현된 윤곽선 속 다양한 신체 동작으로 드러난다.


<영웅의 장례식>은 다비드의 형식 변화에 있어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는 신체동작을 강조하는 회화 작품을 만들기 위한 긴 실험에 돌입한다. <벨리사리우스>와 <안드로마케>는 그런 점에서 과도기적인 회화작품이다. 앞서 보았듯 두 작품에서 신체 표현은 인물의 감정과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핵심적이지만 화면 속 인물들, 가령 <벨리사리우스> 속 놀라고 있는 병사의 과장된 표정과 <안드로마케> 속 슬퍼하는 안드로마케의 모습은 과거의 표현 방식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로마에서의 영향이 온전히 자신의 회화적 언어로 구성된 것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의 의의는 바로 이러한 다비드 회화의 변화 과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작가 자신의 스타일 변화를 넘어 프랑스 화단의 인물 묘사 경향을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작품에 대한 형식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며 그것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미술계 내의 변화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저자는 신체 표현을 강조한 다비드의 화풍이 남성 신체와 국가를 일종의 유비 관계로 파악하던 당대의 사상조류와도 부합한다고 설명한다. 이 시기 신체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생물학적 관심 이상의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신체는 으레 문명의 안락함으로 인한 허약함, 도덕적 타락과 연관 지어졌다. 특히 당대에 궁정취향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문화적 경향들은 이러한 타락을 드러내는 한 단면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작품은 왕실 주문으로 제작된 그림임에도 사회비판적 함의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다비드가 이 시기 혁명과 연관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슈테판 거머(Stefan Germer)와 후베르투스 콜레(Hubertus Kohle)가 지적한 바 있듯 다비드 작품들이 국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성으로 읽히게 된 것은 혁명 이후의 일이었다. 비록 그가 프랑스혁명 이후 그 대의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지만 이 시기 그의 목적은 기존 프랑스 예술계의 관례적 표현들을 반대하는 것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럼에도 당대의 신체 관념 속에서 호라티우스 형제 속 건장한 남성들이 다른 의미에서 반정부적 함의로 읽혔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때문에 작품이 혁명과 직접적인 연관관계(특히 프리메이슨과의 연관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관계가 없다고 볼순 없었다. 최소한 작품 안에는 작가의 의도여부와 관계없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독해될 소지가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c.f) 르 브룅의 강연 내용은 신상철, 「프랑스 예술가들의 공간,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의 형성과정과 샤를르 르 브룅의 회화 규범」,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vol. 44, 2016.에서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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