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델 Jul 17. 2021

풍속화는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다?

2010년대 김홍도 《풍속화첩》을 둘러싼 논쟁들



매주 주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한국과 아시아 각국의 문화재를 보기 위한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특히 2층 서화관은 조선시대 회화 작품들을 보기 위한 관람객들이 항상 넘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진경시대의 화가들은 오늘날 미술에 친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영정조 시대 혹은 숙종 연간까지 소급해서 이해하는 진경시대는 한국의 미술사에 있어서 문화의 르네상스의 단면을 보여주는 시기이기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물론 진경시대 그 자체를 하나의 시대구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나아가 진경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조선시대 미술에서 별도의 용어로 두어야 할 만큼 특수성을 가지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인 걸로 압니다) 이 시기의 화가들은 그 유명세와 의의만큼이나 다양한 매체에 등장했는데  당장 드라마 <바람의 화원>으로 널리 알려진 혜원 신윤복부터 시작해서 표암 강세황, 겸재 정선은 책, TV 등으로 수 없이 많이 다루어진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만을 따지자면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만큼 일반인들과 미술애호가들에게 큰 인지도를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김홍도의 여러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풍속화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유심히 보신 분들은 김홍도의 풍속화가 국보가 아니고 보물이라는 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 실제로 풍속화첩은 그 유명세와는 다르게 국보가 아닌 보물 52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국보가 될만한 것들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면 그 가치가 생각보다 떨어지거나 논란이 많은 경우 국보가 아닌 보물로 지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첩의 경우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풍속화첩은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진위 여부로 논란이 많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논쟁의 결과가 매듭지어지는 모양새입니다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해당 시기 전공자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던 문제였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풍속화첩 25점이 모두 김홍도의 작품인가?  즉, 풍속화첩에 삽입된 25점의 작품 중 일부 그림이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에 의해서 고쳐 그려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지적은 최근 몇 년간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90년대부터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대한 논란이 존재했었고 그때마다 학자들은 반박과 재반박을 통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따라서 2010년대에 벌어진 이 논쟁은 1,2년 사이에 벌어진 단발성 논쟁이 아닌 수십 년을 거쳐서 논리가 보강되고 증거들이 보충된 장기적인 논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논쟁은 그간의 성과를 통해서 정립된 논증들이 연구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수용된 상태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그 파급력이 더 컸습니다. 본격적으로 논쟁이 불붙기 시작한 2012년 이전에 이미 김홍도에 대한 많은 논문들이 쓰인 상태였고 그에 대한 연구성과들도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국공립, 사립 미술관들에서 열렸던 진경시대에 대한 도록들을 보면 그것들이 확인이 가능한데 12년과 13년 진경시대를 다룬 전시회의 도록들을 보면 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연구성과가 정제된 글로서 쓰이고 대중들에게까지 전파되고 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경시대를 상징하는 한 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김홍도에 대한 의심은 적잖은 학문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포문을 연 것은 한성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강관식 교수였습니다.  2012년, "<단원풍속도첩>의 작가 비정과 의미 해석의 양식사적 재검토"라는 논문에서 단원 신화의 허상이라는 도발적인 소제목을 앞세워 각 도첩의 양식적 문제와 이에 따른 진경신화의 허상에 대해서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지적은 김홍도의 풍속화첩을 비판적으로 보았던 연구자들이 공통으로 취하는 태도였습니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태도는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그간 정전으로 여겨져 왔던 편년 방법과 양식 측정에 대한 광범위한 재검토 작업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경시대는 특히 이러한 검토 작업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검토 과정에서 김홍도의 작품을 포함한 시대 구분의 지표작품으로 분류되던 많은 작품들이 모작 논란이라는 도마 위에 세워져야 했습니다. 이처럼 단원 김홍도에 대한 논란은 비단 해당 작품의 논란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닌 군사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윤색되어온 민족주의의 허상을 미술사의 차원에서 걷어내려고 하는 노력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묘사의 측면에서 보이는 오류와 편집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도1> 김홍도, <씨름>,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도2> 김홍도, <서당>,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가령 <씨름>의 경우 왼쪽 아래 동그라미 쳐진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손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묘사상의 오류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이런 오류는 풍속도첩 전반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실수 중 하나입니다. 또한 유명한 풍속화 중 하나인 <서당>에서도 왼쪽 상단 동그라미 쳐진 부분의 인물 묘사가 어색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어깨뽕을 넣은 듯 부자연스럽게 붙어있는 팔의 모양새는 비단 서당에만 한정된 오류는 아닙니다. 사실문제의 핵심은 이런 오류가 비단 위 두 작품의 문제가 아닌 <타작>이나 <담배썰기>와 같은 작품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류에 관해서 학자들은 풍속도첩이 오랜 시기 동안 제작되었다는 점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다시 말해 현장에서 즉석으로 스케치한 것이 아닌 초기 구상 정도만 잡아놓고 이후에 시일을 들여 천천히 작품을 완성해 갔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오류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작품 제작시기에 있어서도 조악한 필치를 통해 초기 화풍이라 보는 의견이 있는 반면 주제만 부각하는 과감한 생략을 근거로 40대, 혹은 만년의 완숙한 화풍이라 주장하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이토록 갑론을박이 많았던 만큼 애초에 이 작품이 김홍도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 또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김홍도가 일반적으로 묘사에 있어서 실수가 별로 없었다는 점은 작품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주장에 더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김홍도의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요? 이 문제를 제기한 많은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화첩이 다수의 사람에 의해서 그려진 작품이라고 추정합니다. 우선 몇몇 작품에서 덧대어 그린 흔적이 있고 종지의 재질 또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편집의 흔적으로 제기되는 이런 증거들은 이 작품의 신뢰성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켰습니다. 심지어 이런 주장은 미술사적인 맥락에서도 꽤나 타당한데 진경시대 이후 화원화가들은 김득신, 김홍도의 풍속화를 교본으로 삼아 그림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속화첩은 김홍도의 일부 작품을 모작했거나 기존의 그림에 후대 사람들이 그림을 추가한 일종의 교과서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을 대하는 입장은 같은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작품의 전체가 김홍도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일부 작품들만이 김홍도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김홍도가 그린 것이 아니라면 누가 그린 것이냐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김홍도와 같이 풍속화로 유명한 김득신의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김득신의 그림을 모작한 화원화가의 그림이라는 주장 혹은 전체가 김홍도의 화풍인것은 맞지만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덧칠한 변형본이라는 의견까지 다양한 결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주장의 농도가 어떠하던 위의 주장은 얼핏 보기에 반박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그림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형태 문제를 걸고넘어졌고 그것을 뒷받침할 묘사 상의 오류까지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오류를 단지 몇몇 작품에서 한정해 지적한 것이 아닌 화첩 전체에 걸쳐서 지적하고 이에 대한 묘사 상의 실수를 증거로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미술사의 논쟁에 있어서 형식 문제는 매우 민감한 척도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굳이 한국의 미술사학계가 아니더라도 이 점은 거의 공통적인 사항입니다. 일례로 영국의 고전주의 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의 경우 렘브란트의 그림에 덧칠을 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영국 미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고 후대에 끼친 영향이 막강했다는 것은 형식의 (무단)차용 문제에 있어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형태 문제에 대한 반박은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또한 미술사를 둘러싼 논쟁의 향방을 보았을 때 시대정신도 어느 정도는 여기에 웃어주는 듯 보입니다. 그간 민족의 전통이라 해서 객관적인 분석이 어려웠던 몇몇 작품들이 세계사적 차원에서 혹은 과학적 방법론의 차원에서 비교되었고 그 결과 기존의 해석들이 뒤집힌 사례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논쟁의 향방을 보았을 때 풍속화첩은 김홍도의 그림인 것으로 가닥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논란이 완전히 종식된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낸 결론은 "모든 작품"이 후대에 그려진 작품은 아니다라는 것이지 아직도 몇몇 작품들은 그 논란의 열기가 식기는커녕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 풍속화첩을 김홍도의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기계적인 작품 비교는 분석에 치명적인 오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작품을 하는 작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깔려 있습니다. 그 질문은 다름 아닌 "작가가 평생 자신의 이력을 쌓아오면서 한번도 실수한적이 없겠는가?"라는 점입니다. 제 아무리 명작을 쏟아내는 거장이라 하더라도 묘사 상의 실수는 종종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런 인간적인 실수를 작품의 강점으로 내세운 화가들도 존재합니다. 특히 한국의 미술을 논할 때 소위 해학이 넘치는 그림이라는 것은 작품의 주제에서 드러나는 해학성뿐만 아니라 묘사 자체에서 오는 해학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그런 해학성의 정점을 보여준다 했을 때 그 의미는 이중의 뜻이 내포되어 있지 주제에만 한정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논지입니다. 또한 덧대어 그린다는 점에 대해서도 단원이 필치가 다른 여러 종류의 붓을 썼다는 사실로 반박이 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작품을 볼 때 세세한 묘사를 따지기보다 작품의 구도나 주제의 참신성을 주목하라고 합니다. 풍속화첩은 그가 자신의 풍속도를 집대성하고자 그렸기 때문에 여러 다양한 구도가 보이고 따라서 제3자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화풍으로 읽힐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화풍은 풍속화첩이 진작이 아니라는 증거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단원이 다양한 구도 사용에 능숙했다는 증거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김홍도가 이 풍속화첩을 그릴 당시 구상을 중요시했다는 점은 인물의 배치 정교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또한 그가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인물만 묘사한 것도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풍속화첩이 단원의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작품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비교의 오류에 빠지지 말 것을 주문합니다. 즉, 풍속화첩과 단원의 다른 그림은 편집 의도나 제작 과정에서 큰 차이가 있기에 단순 1:1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풍속화첩의 경우 현장에서 사생한 그림이 아닌 철저히 계산에 의거해 인물을 배치한 일종의 상상화에 가깝기 때문에 인물 배치 과정에서 다소간의 오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 그림의 목적은 김홍도가 말년 혹은 40대즈음에 자신이 그렸던 풍속화의 전형들을 한데 모아서 그려놓은 일종의 사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작품이 아니라 사전이라는 주장은 오늘날의 미술사가들이 단순한 드로잉 스케치나 미완성본을 보고 작품의 질을 따지는 오류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주된 비교대상으로 삼는 사생화들의 경우 작품이라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때문에 그의 전형적인 특징인 정확한 묘사가 주된 목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목표 차이로 인해 묘사를 하는 태도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요컨대 노트에 연습 삼아 혹은 형태들을 정리하기 위해 끄적거린 그림들을 실제 작품의 분석방법으로 바라보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3> 김홍도, <장터길>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 공간감을 잡기위해 김홍도는 단 하나의 선만을 사용했습니다. 동양화가 보여주는 선의 미와 풍속성이 잘 드러납니다



 김홍도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들은 그림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줍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그림의 평가에 있어서 묘사력이라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적용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김홍도는 풍속화첩은 실제 분석의 단계로 들어가면 여러 묘사 상의 오류가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류에도 불구하고 여타 다른 요소들과 역사적 가치로 김홍도의 풍속화는 대작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예는 수 없이 많지만 그것이 조선 후기 최고의 화원화가로 불리는 김홍도를 바라보는 시선이기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이런 고민과는 별개로 그림에 대해서 학자들이 벌이는 논쟁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도들에게 좋은 질문거리이자 공부거리입니다. 쏟아져 나오는 논문에 경악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양질의 논쟁을 학생 시절 지켜본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글은 2015년 5월 28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꽤 시일이 지난 글이니 최신 논의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지만 논쟁을 둘러싼 큰 얼개는 여전히 글에서 소개한 경계선 내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글에서 밝히고 있듯 이 논쟁이 활발히 벌어지던 2010년대 초반과는 달리 지금은 이와 관련된 글이 많지 않은지라 지금 이 글을 다시 업로드해도 큰 문제는 없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2021년의 고지에서 이 논쟁의 결론에 대해 개인적 의견을 보태자면 김홍도의 풍속화첩은 어떤 방식으로든 후에 가작을 했을 가능성이 높고 설사 화첩 내에 김홍도의 작품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작품을 김홍도의 것으로 보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학계 내에서도 꽤 많은 공감대를 얻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가령 2020년 장진성 교수는 『단원 김홍도―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이라는 책에서 김홍도의 작품이 후대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이와 관련해 이미 2014년 신선영 선생은 조선말기와 개항기 김홍도의 풍속화첩이 대중적 인기로 말미암아 여러 화가들에 의해 모방되었고 이것이 서화 시장에 광범위하게 유통된 바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신선영, 〈개항기 ‘김홍도 풍속화’의 모방과 확산〉, 미술사학연구 283,284, 2014.) 요컨대 우리가 김홍도의 진작으로 알고 있는 풍속화첩 또한 이러한 당대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후대에 창작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이죠. 


김홍도 풍속화첩에 대한 논란은 그것이 진짜야 아니냐라는 자극적인 의문을 제하고서라도 미술 감상에 있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듯합니다. 미술 작품을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미술가, 미술 작품에 대한 신화화는 대상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초래합니다. 작품에 대한 형식적, 내용적 분석이 아닌 거장의 명성과 선학들의 찬사 속에서 작품을 보면 실제 그것이 어떠한 퀄리티를 가졌든 간에 좋은 작품, 나아가서는 명작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풍속화첩을 둘러싼 2010년대의 논란은 바로 그러한 편견을 다시금 생각해보고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 상기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비단 학문적 논쟁으로서만이 아닌 예술 감상에 있어서도 큰 시사점을 던져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화가 장욱진이 만난 인물과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