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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l 16. 2021

화가 장욱진이 만난 인물과 시대

장욱진(1918 ~ 1990)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


1986년 봄. 초로의 늙은 화가가 경기도 용인의 작은 시골마을에 집을 잡았다. 이제 나이 70을 바라보는 그의 이름은 장욱진. 동양화와 서양화의 결합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해나간 화가다. 흔히 종합화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불리는 장욱진의 후기 화풍은 장욱진이 자리잡은 이곳.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신갈동에서 구축이 되기 시작하며 그는 이곳에서 그의 작품중 1/3에 해당하는 작품을 쏟아낸다.


장욱진은 근,현대를 대표한 여느 화가들보다 장수했다. 때문에 그는 근현대사에 굵직 굵직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만났고 오늘날에는 교과서에나 기록되어 있는 수 많은 사건들을 몸소 겪었다. 때문에 비록 장욱진의 회화 연구에 있어서 이런 정치, 사회적인 상황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실제로 김영나 선생은 장욱진의 회화 연구에 있어 정치, 사회적 상황이 큰 연관관계가 보이지 않는다고 서술한 적이 있다)그가 살았던 생애를 둘러보는것 자체는 한국의 현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즐거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 1933년 수덕사에서 나혜석을 만나다.


나혜석 (1896 ~ 1946)


나혜석은 한국근대미술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화가다. 한국의 1세대 서양화가로 비교적 일찍 프랑스로 건너가 야수주의와 같은 선구적인 화풍들을 화폭에 담았다. 또한 나혜석은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명목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한 그녀에 대한 일화다. 하지만 그녀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진보적인 사상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았고 말년에는 병으로 고생하다 행려병자로 죽었다. 1933년 17살이던 장욱진은 전염병인 선홍열을 앓아 수덕사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게 우연히도 그곳에서 나혜석을 만나게된다. 당시 나혜석은 이곳에 있던 일엽 스님을 만나기 위해 수덕사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 시기의 나혜석은 갖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고 아직 수면위로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이었던 김우영, 최린과의 관계 문제도 있던 시점이었다. 나혜석은 그녀가 수덕사를 방문하고 1년뒤인 1934년 정조를 지키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취미 문제라고 쓴 여러 문제적인 글들을 발표하게 되고 이후 육체적, 정신적인 병과 가족,최린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등 험난한 인생을 보내게 된다.



2. 1936년 체육특기생으로 양정보통고등학교에 편입하다.


몇 개월간의 요양 이후 장욱진은 체육특기생으로 양정보통고등학교에 편입하게 된다. 그는 당시에 키도 컸었고 체격도 다부졌기 때문에 체육특기생으로 학교에 들어올수가 있었다. 그의 주 종목은 높이뛰기와 빙상이었고 선수로도 활약했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가 택한 길은 화가의 길이었다. 이미 학생 시절 수 차례 입상을 한 경력이 있던 장욱진은 비록 가족들이 극렬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이런 그의 열정은 1938년 조선일보 주최의 제2회 전국학생미전에서 <공기놀이>등을 출품해서 최고상인 사장상과 중등부 특선상을 받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후 가족들은 미술을 극렬히 반대하는 쪽에서 지지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것은 그의 화려한 수상 경력이 아닌 그가 편입학한 양정보통고등학교다. 그가 들어간 양정보통고등학교에서는 1936년 당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모교의 마라토너를 축하하기위해 한참 도시락에 마라우승이라는 글귀를 적고 있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래의 사진들로 대신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1914 ~ 2002)



3. 1941년 이순경과 결혼하다.


양정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한 장욱진은 형의 도움을 얻어 1939년 4월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 당시 미술을 공부 했던 조선인 학생들의 일본 유학 루트는 장욱진 처럼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제국미술학교가 자유로운 교풍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 국사를 배우지 않고도 입학할수 있었던 학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조차 유학생들은 조선인이라면 느껴야 했던 많은 차별과 서러움을 느껴야 했고 그것은 장욱진 또한 마찬가지 였다. 그는 일본 유학 도중 이순경이라는 조선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순경은 다름아닌 역사학자 이병도의 딸이었다. 이병도는 진단학회보를 만들고 한국에서 실증사학을 확립한 인물로서 후일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을 지내게 되는 인물이다. 이렇게 엄청난 장인을 둔 장욱진이지만 정작 이병도는 가난한 화가였던 장욱진이 자기 딸을 고생시키는게 미워 한번도 전시회에 찾아오지 않았고 장욱진의 경우에도 박사 집안 특유의 분위기가 싫어 명절에 세배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냉랭한 장인과 사위의 관계에 대해서 장욱진이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지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장욱진에게 장인의 집안에 대해 물어보자


"거기 있는 사람은 다 박사야! 사람은 나 하나뿐이야!"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아내 이순경은 장욱진을 만난 이후 온갖 고생을 다했다. 결혼 초기 유학생 시절에는 그가 징용으로 끌려간적도 있었고 그의 생애 전반에 그와 뗄레야 뗄 수 없었던 폭주 습관 때문에 평생을 내조해야 했다. 그가 죽은뒤 장욱진 20주기 회고전에서 장욱진의 큰딸은 "어머니는 시집을 오셨을 때는 요조숙녀에다가 세련된 신여성이었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자식을 키우는 억척스런 엄마로 변했다"라고 말했으니 그 고생이 어느정도였을지 상상이 간다.


이병도 (1896 ~ 1989)



4. 1951년 1.4 후퇴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가다.


1951년 중공군의 공격으로 장욱진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외부의 사회, 정치적 상황은 도저히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지 못했다. 이 즈음 시작된 폭주 습관은 그의 인생 평생 짊어지게 되는 습관이며 이 당시의 절망적인 심정은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자화상>에 잘 나와있다.


<자화상>, 1951, 종이에 유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의 자화상은 그가 몸을 추스르기 위해 고향인 연기군에 머물렀을 시절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 나오는 풍경에서는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 논이 작품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작가의 가공된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다. 1951년의 어느 논이 저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다웠겠는가? 한반도 곳곳이 전쟁의 상흔으로 잿빛 풍경이 반복되는 혼란했던 1951년. 장욱진은 자신의 그림에서 조차 작금의 비관적인 현실을 묘사하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너무나도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은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 상황에서는 나올 수 없는 모습이다. 그는 전쟁의 현실에서 자신만의 상상의 공간을 통해 위안을 얻은것이다. 그에게 술과 그림만이 지독히도 매정한 현실을 벗어날수 있는 수단이었다. 당시의 절망적인 심정은 그가 했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전쟁이 한창이던 그는 이런말을 했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5. 1956년 이중섭 죽다.


이중섭(1916 ~ 1956)


전쟁이 끝난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에서 교수직을 받아들이고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된다. 하지만 자유인이었던 장욱진에게 교단에 묶여있는 자신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가르치는 일에는 영 흥미가 없었다. 그는 6년 뒤인 1960년 창작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를 들어 교수직을 사임하게 된다. 장욱진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부임하던 1956년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혹자는 한국의 고흐라고 일컬으며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중섭이 바로 그다. 장욱진과 이중섭. 이 둘은 많은 공통점이 있는 화가다. 우선 둘은 일본 유학파였고 심지어 학교도 같은 학교를 나왔다.(물론 이후 이중섭은 학교를 옮기게 된다) 또한 이 둘은 가족이라는 소재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한 가지 차이라면 이중섭이 가족을 보지 못하는 그리움에 사무쳐 그림을 그렸다면 장욱진의 경우 그 반대였다는 것이다. 이중섭의 죽음이 장욱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장욱진 본인만이 알테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제 우리에게 없다.



6. 1960년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하다.


1960년은 한국의 정치사에서 격동의 시대였다. 이 시기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인해 사임을 하게 된다. 60년 당시 학생들은 시위 때가 되면 장욱진의 집으로 매일같이 몰려오곤 했다. 그때마다 정부는 장욱진을 시위를 부추긴 주동자로 의심하고는 했지만 장욱진은 그런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1960년 당시 장욱진이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한 것도 사실 그가 학교 혹은 정부에서 압력을 받았다기 보다는 본인 스스로가 교단과 집을 오고가는 경직된 생활 패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한 장욱진은 이후 명륜동의 한옥을 양옥으로 개조하고 작품에만 몰두한다. 그후 1963년 작가는 경기도 덕소에 화실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른바 장욱진의 중기 화풍이 완성된 덕소시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7. 그 후...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


장욱진의 작품 세계를 말하는 키워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무다. 실제로 그에 대한 회고전시 제목 중 하나도 나무와 새에 관련된 것이었다. 나무는 장욱진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다. 학자들은 나무의 묘사 변화에 따라서 장욱진의 화풍 변화를 이해하기도 하니 장욱진에게 있어서 나무란것이 어떤것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다. 이처럼 자연의 것들을 소중히 여겼던 그는 회고담에서 말한것 처럼 도시 문명의 갑갑함을 싫어했다. 그는 이런 갑갑함을 피해 서울대 교수직을 사퇴한지 얼마안가 덕소라는 시골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당시 덕소는 전기조차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였고 인적도 매우 드물어 옛 시골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작가는 가족, 자연을 주제로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고 스스로 자신의 집을 "강가의 아틀리에"라고 불렀다. 하지만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는 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도 닥쳐왔다. 오늘날 많이 알고 있듯이, 덕소는 이제 더 이상 시골이 아니다.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며 지하철이 다니는 남양주시의 신도시가 된 것이다. 장욱진은 자신이 사랑했던 덕소가 변하자 다시 서울의 명륜동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도시에 머무르는 체질이 아니었다. 서울 명륜동에 있을적에도 그는 자주 지방의 사찰을 돌아다니고는 했는데 이것은 그가 불교와 인연이 깊은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연을 찾아 떠나고 싶은 그의 심정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후 장욱진은 거처를 충남 수인보로 옮긴다 농가를 화실로 고쳐 터를 잡은 그는 다시 작품에 몰두했으며 작품이 되지 않을때는 한국전쟁 이래로 생긴 습관인 음주로서 자신을 달래고는 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


1986년 장욱진이 마지막으로 터를 잡은 곳은 용인이었다. 당시에 이곳은 시골이나 다름 없었던 곳이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기 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는 아들들을 먼저 세상에 떠나 보내야 했고 수 차례의 외국 여행을 통해 예술적 감명을 받기도 했다. 1990년 12월 27일 오후 4시 점심 식사를 하던 도중 장욱진은 갑자기 쓰러졌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의 생애는 여기까지 였다. 그는 아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많은 세월이 흘러 그가 자리를 잡은 용인은 이제 회색 콘크리트가 덮힌 삭막한 도시가 되었다. 그의 예술은 주로 그가 머물렀던 시기를 따라서 분류를 하는데 수인보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곳은 그가 갑갑하게 느꼈던 회색빛의 도시로 물들었다. 발전하는 경제 성장속에서 푸른 자연이 퇴색되어 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목도하고 도망치듯 떠난 그의 생애 전반을 보면 산업화라는 것이 가지는 부정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보게 한다.


나무와 새, 1957, 캔버스에 유채, 장욱진미술재단.


가로수, 1978, 캔버스에 유채, 장욱진미술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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