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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l 18. 2021

겸재 정선, 하늘을 칠하다

18세기 조선회화의 서양화 기법과 소중화주의

정선, 《금강전도》, 1734년, 종이에 수묵담채, 이건희컬렉션.


겸재 정선(1676 ~ 1759)은 김홍도와 더불어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옛 화가가 아닐까 합니다. 조선조의 화가들 중 강세황과 더불어 단독으로 전시를 꾸밀 수 있는 몇 안 되는 화가이기도 하고 또 이 시기를 상정하는 특수한 시대적 구분으로 인해서 많이 알려진 화가 기도 하지요. 하지만 학술적인 영역에서 정선은 아직까지도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화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출신성분에 대한 논쟁부터 시작해서 작품들의 양식적 구분에 이르기까지 아직 제대로 정립된 정론이라는 것이 없어 쉽사리 그에 대해서 서술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뒤집어보면 정선이라는 인물을 많은 사람들이 연구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인물에 천착하는 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러 다양한 학설들이 나오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다양한 논쟁들이 촉발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중에서 겸재 정선의 논의에 있어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행보를 보인 인물은 소위 '진경시대'라는 말을 조선 후기 문화사의 한 축으로서 도입하고 이를 널리 보급한 최완수 선생님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80년대에 그가 쌓아 올린 연구 성과와 90년대 연구성과의 집약, 보급은 진경시대라는 용어를 조선 후기의 미술상을 대표하는 용어로 만들었습니다. 00년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일반 대중들까지도 진경시대라는 용어에 대해서 알게 되고 오늘날 이 시기 미술을 설명하는 익숙한 용어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최완수 선생님은 정선에 대한 문헌적 고찰과 작품에 대한 치밀한 양식적 접근을 기반으로 18세기 미술을 재구성했는데 이를 통해 조선소중화주의, 조선성리학, 낙론계 노론의 지원이라는 세 개의 큰 틀이 진경시대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주장을 피력했습니다. 최완수 선생님의 이론은 진경시대론이 주창된 시기와 그 근거를 통해서 알 수 있듯 그 출발이 70~80년대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타파하기 위한 내재적 발전론을 출발로 삼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 진경시대론은 많은 학자들의 비판을 받아왔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비판이 존재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중 하나인 양식적, 외재적 접근을 통한 진경시대론 비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최완수 선생님이 주창한 진경시대론의 근본적인 한계는 조선 후기에 존재했던 여러 가지 경향들이 진경이라는 하나의 틀로서 설명된다는 점입니다. 숙종조 혹은 영조대부터 시작해 정조 통치 말기까지 이어진 긴 시기가 진경이라는 용어 하나에 통합되어 버려 그 다양성이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활발하게 벌어졌던 사행 활동이 최완수 선생님의 글에서는 거진 간과되어 있거나 혹은 중요한 요소로 꼽히지 않고 있습니다. 내재적 접근에 근거한 진경시대론 즉, 최완수 선생님의 진경시대론은 어디까지나 소중화주의, 조선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며 인적 구성으로는 노론계 인사들의 지원 하에 일어난 문화현상이었기에 외재적인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분석에 의거하면 남종화풍 계열의 사의화나 서양화적 영향 심지어 풍속화의 경향마저 간헐적인 것에 그칠 뿐만 아니라 조선 회화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기실 18세기 조선의 회화 양상은 진경회화라는 말로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 부족할 정도로 다양했고 중층적인 양상을 띄었습니다. 


진경시대론의 또 다른 문제점은 이 시기의 미술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사상적인 경향을 중시했다는 것입니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고의 표현이라는 측면이라는 점에서 사상적인 부분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당장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이 금강산을 표현한 그림이라는 것에서부터 대상의 선택이 사상적인 측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특히 최완수 선생님은 여러 사상들 중에서도 소중화주의를 강조하는데 그에 따르면 조선의 사대부들이 소중화론을 주장했던 것처럼 미술의 영역에서도 더 이상 중국의 도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풍경을 그려야 하고 그것이 곧 산수화의 새로운 준거로 자리잡는 경향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금강산은 마치 조선 전기, 중기의 화가들이 중국의 소상팔경을 그렸듯이 새로운 성리학적 이상향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재해석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완수 선생님이 정선의 <금강산도>를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보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였습니다. 한국적 사상을 토대로 한국적 풍경을 한국적 기법으로 그린 것이 바로 진경회화의 요체요 그것이 즉 조선의 사상적 기반을 회화적으로 구현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정선 그 자신이 여러 기록들을 통해서 사서삼경에 통달한 지식인이라는 점이 밝혀졌고 당시의 사상적 조류에 대한 이해 또한 깊었다는 점이 이 점을 뒷받침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당연하게도 양식적 부분에 대한 반론이 제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그림을 사상적 연원에서 따져 올라가는 것이 아닌 양식적인 연원에서 따져 올라갔을 때 굳이 금강산 도상을 진경시대 회화의 요체로 간주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조선 초,중기에 있었던 실경회화의 전통이 18세기 회화상에 이어졌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고 더 넓게 보면 진경시대라는 것이 결국 이전 시기 회화 경향의 연장선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가령 금강전도의 경우 이전 시기 화원화가들이나 사대부 화가들에 의해 종종 그려져 왔고 그런 전통이 정선이 살았던 시대에 이르러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것이지요.


최완수 선생님의 진경산수화론에 대한 또 다른 양식적 반론으로는 정선 자신이 남종화풍을 기반으로 하여 진경산수화를 개척했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가령 진경산수화론에 대한 반론으로 왜 조선시대 중기에는 '조선적 성리학'이 발달했음에도 이러한 화풍이 등장하지 않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한 해답은 사상적 측면이 아닌 화법의 유입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상적인 측면만으로 진경문화를 설명하려 들 때 이 질문은 썩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진경시대론에서 주장한 사상적인 측면들은 기실 조선 중기에 그 기반이 닦여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화사적으로 남종화풍이 조선 후기에 유입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남종화풍이 조선의 화가들에게 널리 보급되고 익숙한 것이 될 때 진경산수화풍이 촉발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도 있을겁니다. 물론 이 주장은 중국 화법의 유입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조선의 실경산수화 전통을 통한 진경산수화의 이해와는 결을 달리합니다. 그럼에도 두 주장이 모두 미술사의 기본적인 방법론인 양식적 분석을 토대로 나온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요. 결론적으로 이들 주장이 최완수 선생님의 주장과 가지는 중요한 차이점은 이 시기 미술 경향을 지나치게 특수한 양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혹은 동아시아 미술의 연장선으로 봄과 동시에 이 시기 화가들에 대한 지나친 신화화를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최완수 선생님은 겸재 정선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성(畵聖)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는데 이 견해는 많은 당연 많은 학자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만약 양식적인 측면으로 이 시기의 회화를 바라보게 되면 최완수 선생님의 진경시대론이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했던 새로운 요소가 하나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서양화의 도입 측면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주장은 크게 보면 외재론으로 연결되는데 결국 외국 문물의 유입이라는 것이 사행을 통한 중국인들과의 교유를 통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정선의 《금강전도》에도 이런 서양화의 영향이 보이게 되는데 가령 하늘을 칠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반적인 동양의 산수화에서 하늘은 대게 빈 공간으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처리 방식을 두고 여백의 미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정선은 독특하게도 우리가 하늘로 인식하는 공간에 파란색 채색 안료를 칠함으로써 일반적인 회화들과는 차이점을 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하늘을 칠하는 전통이 서양에서 내려져온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즉, 정선은 서양의 기법을 가장 한국적이라고 평가받는 그림에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사실 정선이 서양화를 보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기상으로 보았을 때 정선이 서양화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또 실제로 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 시기 연경 사행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서양화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공교롭게도 그중 일부는 하늘을 칠하는 (그들에게 있어)독특한 전통을 기록한 사례가 존재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가 실학자라는 분류로 널리 알고 있는 홍대용인데 그의 담헌서에는 이런 재밌는 기록 하나가 나옵니다. 



문에 들어가니, 두 사람이 아직 나와 있지 않았기에 양쪽 벽의 그림을 구경하였다. 누각과 인물은 모두 훌륭한 채색을 써서 만들었는데 누각은 중간이 비었으며 뾰족하고 움푹함이 서로 알맞았고 인물은 둥둥 떠서 움직이고 있었다. 더욱이 원근법에 조예가 깊었는데 골짜기의 나타나고 숨은 것이라든지 연기와 구름의 빛나고 흐린 것이라든지, 먼 하늘의 공계까지도 모두 정색을 사용하였다. 

홍대용, 《담헌서》의 일부 발췌              



일반적으로 조선 지식인들의 서양화에 대한 기록에는 원근법에 대한 놀라움이 많이 나타나는데 홍대용은 독특하게도 원근법뿐만이 아니라 채색 방식의 독특함까지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의 눈에 하늘을 칠하는 서양화의 방식이 상당히 이채롭게 느껴졌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이 홍대용과 정선이 직간접적인 연관관계가 있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홍대용의 기록은 다만 당시 조선인의 눈에 하늘을 칠하는 것이 신기하게 비쳤다는 점을 확인해줄 뿐이지요. 그렇다면 정선은 어떻게 서양화를 접할 수 있었을까요? 학자들의 추정으로는 겸재 정선이 자신을 지원했던 안동김씨 일가의 어떤 인물을 통해 서양화를 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인물은 안동김씨 일가 중에 정선과 친분이 두터웠던 김창업(1658 ~ 1721)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가 1712년 연경사행을 다녀왔고 그것이 《가재연행록》이라는 그의 여행기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정선이 김홍도처럼 연행길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 서양화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무렵 서양화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이국적인 물품으로 인식되어 유통되고 있었기에 어쩌면 서양화를 실견했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정선이 칠한 하늘색은 그간 내재적 접근법을 기반으로 규정한 진경시대가 생각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많은 학자들이 오늘날 진경시대이라는 것이 18세기 문화의 전부를 설명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의 경향에 불과하다고 보는데 실제 그것은 다름 아닌 진경시대의 대표 화가인 정선의 작품에서 드러납니다. 나아가 진경시대론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논쟁은 비단 조선시대 회화의 흐름을 통해서 이 시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3국의 미술 양상을 토대로 18세기를 이해하는 경향도 생겨났습니다. 가령 중국에서는 명말청초, 일본에는 에도 막부 중기에 이르는 시기에 광범위하게 일어난 실경회화의 전통의 연장선에서 조선의 18세기 회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자에 활발하게 발굴되고 있는 조선 중인 수장가들의 작품집에서 재확인되고 있는 바이기에 차후의 연구 성과가 이쪽으로 많이 나오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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