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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l 19. 2021

조작된 전통

우암 송시열과 신사임당의 초충도


15~16세기를 지나면서 조선의 회화는 다양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또 완숙의 경지에 올라갑니다. 모 출판사의 한국사 시리즈에서 16세기 조선사를 다룬 책의 제목을 '성리학 유토피아'라고 잡았는데 회화의 영역에서 그 설명은 정말로 딱 들어맞는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 회화의 가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산수화 부문에 있어서 이 시기의 완성도는 이후 세대의 전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가령 내용적인 측면에 있어서 유학적 주제에 더 없이 충실했고 형식 측면에 있어서도 사대부들이 칭송해 마지 않았던 송, 원대 유학자들의 화풍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신사임당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산수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겁니다. 당연한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신사임당의 그림하면 5만원권에 인쇄된 초충도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사임당의 것으로 널리 알려진 초충도는 단지 전칭작에 불과할뿐 실제로 그녀가 이 그림을 그렸다고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 과하게 말하면 국립중앙박물관에 그녀의 작품이라고 전시된 작품들 중 진짜 신사임당의 작품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은 단 한 작품도 없습니다. 즉, 그녀의 그림으로 알려진 것은 제 3자의 평가나 형식적 분석을 통해서 추론해낸 전칭작들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진실을 말하자면 신사임당은 당대에 초충도 보다는 산수화에 더 능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겁니다. 가령 그의 아들 율곡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을 보고 화평을 남겼는데 비단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그림을 보았던 다른 사대부들도 산수화가 뛰어나다는 평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7살부터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며 마침내 산수화를 그리신 것이 극히 묘하였고(極妙), 또한 포도를 그렸으니 세상에 능히 견줄만한 이가 없다.

《율곡전서》, 〈선비행장〉 발췌


이런 평가는 그녀가 죽은 이후 한동안 지속되지만 웬일인지 본격적으로 신사임당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가 진행된 1960~70년대에 와서는 그녀가 초충도의 대가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났던 전시가 하나 있었는데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명화근오백년展>이었습니다. 이 전시는 일반인들에게 신사임당의 작품을 최초로 공개한 전시였는데 그 때 공개된 작품은 다름아닌 오늘날 5만원권에 인쇄된 <초충도10폭병풍>이였습니다. 오늘날 신사임당에 대한 인식과 신사임당이 살았던 당대인들의 인식 사이의 괴리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극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좋은 목적이든 나쁜 목적이든 그녀의 그림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죠.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미술사 연구의 양적 팽창이 두드러지게 일어나던 1990년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제가 확인한 가장 이른 논의는 초상화 연구의 대가인 이성미 교수님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간행하던 《미술자료》라는 저널 51호에 기고한 〈조선시대 여류화가 연구〉인것 같습니다. 이후 신사임당의 화평에 대한 연구가 계속해서 진행되었는데 이 연구를 기점으로 신사임당 연구는 작품의 진위 여부에 대한 연구와 신사임당 회화의 평가에 대한 연구가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논문들을 토대로 볼 때 신사임당 회화의 화평이 극적으로 변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이 있습니다. 송시열의 신사임당 회화에 대한 평가는 《송자대전》의 〈사임당화난발〉을 포함하여 총 6회에 이를 정도로 많은데 추측하기를 신사임당이 그가 따랐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화평을 남겼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화평 자체에 있어서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산수화풍이 맘에 들지 않은듯 합니다. 그의 평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송시열은 그녀의 산수화가 좋지 못한 그림이고 심지어 신사임당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설사 이 그림이 신사임당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여성의 그림에 남성의 제문이들어간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며 유자의 도리를 펼쳐야할 산수화에 스님이 들어가 있으니 이치에 맞지 않고 심지어 수준이 지나치게 '전문적'이기에 좋지 못하다는 평을 남깁니다. 송시열이 이러한 평문을 남긴 이후 신사임당에 대한 인식은 산수화의 대가가 아닌 초충도의 대가라는 인식으로 급속하게 바뀌게 됩니다. 특히 18세기 노론으로 분류되는 사대부들의 신사임당에 대한 평론은 일관되게 신사임당을 초충도의 대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송시열이 신사임당을 평가함에 있어서 산수화보다는 초충도를 높게 평가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 신사임당, <이곡산수병>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전에 송시열의 평문 자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송시열은 평문의 일부에서 수준이 '전문적'이라는 평(정확히는 장난삼아 그린것 같지 '않다'라고 하는데 이런 평은 으레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화원화가를 염두해 두고 하는 말로 따라서 전문적이라는 말로 해석이 가능합니다)을 남기는데, 이 언급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의문점을 남깁니다. 도대체 수준이 전문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전문적이라는 것이 그림이 좋지 못한 근거로 사용되는 것일까요? 사실 이 평은 송시열이 어떤 관점으로 이 그림을 보았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구입니다. 다시 말해 송시열은 문인화의 관점으로 신사임당의 그림을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인화의 그림은 근본적으로 희(戱)의 예술입니다. 즉, 놀이삼아 그림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문인화는 그 속에 기본적인 전제 세 가지, 1. 문인화는 전적으로 아마추어의 예술이고 2. (당연히 남성임을 전제로 하는) 사대부의 예술이며 3. 형식의 기교를 넘어 화폭 너머의 사상을 표현한 예술이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대중들 사이에서 좋은 미술의 바로미터로 인식되는 사실성의 재현은 문인화의 관점에 있어서 제1의 미덕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문인화가 사실적이지 않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만약 문인화의 개념을 단순 산수화가 아닌 화훼,영모,초충 등으로 범위를 넓히면 사실적인 묘사 또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대 이후 정착된 동양화의 원리 중 하나가 대상을 정확히 그린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기도 합니다. 다만 산수화를 평하는데 있어서 이 지향점이 조금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여말선초 원나라로부터 수입된 문인문화를 배운 조선은 성리학이 점차 국가이념으로 정착됨에 따라 문인화의 전제가 상당히 엄격하게 지켜지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자학이 통치이념의 중심으로 들어서게되는 조선 후기의 상황에 있어 이것은 더욱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이미 명대에 사대부 미술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퇴색되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가령 현대의 미술사학자 중 일부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 한동안 어진이 그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고개지가 주창했다고 알려진 이형사신의 원리에 맞지 않아 사림들이 반대했다는 점이 주요한 가설로 꼽힐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문인화의 기반에 깔려 있는 전제가 조선 사회 내에서 강고하게 지켜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또한 문인화의 관점에 의거하면 산수화는 엄연히 사대부의 예술이어야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여성의 경우 여성의 도리에 맞게 규방과 그 주변으로 공간이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산수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달리 보면 부도(婦道)를 어기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송시열의 평이 마냥 문인화의 근거에 의거했다고 볼 수 없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가령 현재 신사임당의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산수화 작품들을 보면 문인 산수화의 그것과 유사한 양식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위에 나와있는 이곡산수병은 신사임당의 전칭작들 중에서 그나마 신사임당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 중 하나인데 바위와 산세의 표현에서 보이는 강한 먹의 대비는 그녀가 16세기 문인산수화에서 유행으로 대두하고 있던 절파의 양식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서 전경의 언덕, 중경의 강 혹은 호수, 원경의 산이라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원말 사대가들이 정착시킨 전형적인 문인화풍의 구성이며 조선 전기 소상팔경도를 비롯한 기타 유학적 주제의 산수화에서 빈번하게 보이는 구성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송시열이 문인화풍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사임당의 산수화를 저평가했던 것은 근거가 없는 평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산수화가 부도를 지키기 못했다는 암시를 준다는 것도 일견 좋은 반론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왜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난숙기에 이르기 시작한 16세기에는 산수화가로 좋은 평을 받았는가에 대한 의문점이 남습니다. 


따라서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산수화를 저평가 했던 것은 추측컨대 전혀 다른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령 송시열 그 자신이 지적했듯 그림 속에 스님의 모습이 들어갔다는 것은 그의 사상적인 배경과 결부시켜 생각해볼 때 대단한 하자가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학문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율곡 이이를 추앙하는데 있어 그의 어머니가 불교적 상징을 산수화에 집어넣었다는 것은 성리학이 근본인 조선에서 비단 학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큰 결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를 뒷받침 해주는 또 다른 증거가 송시열의 초충에 대한 생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릇 유자의 도는 천지로 부모를 삼는 것이라. 무릇 평생에 천지에 간 것이라면 곤충초목까지 더불어 모두 나의 사랑하는 것 속에 둘지어다.

《송자대전》, 〈진천현괴사당기〉발췌 


초충에 대한 송시열의 해석에 의거하면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는 그 세세한 표현을 넘어 격물치지의 경지를 넘어선 무엇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지를 넘어선 여인이 바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였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핵심은 그녀의 작품의 정체성이 그 자신이 아닌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규정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송시열의 이런 평이 가진 힘은 18세기에 초충도가 화가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또 드러나는데 이것이 한중일 삼국의 문인화 중 유독 조선에서만 두드러졌다는 것은 신사임당이 조선 후기 일부 사대부들이 그들의 통치 체계의 확립에 있어서 회화를 어떠한 수단으로 이용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사임당 초충도가 율곡 이이와 그 후학들의 유학적 정통성 세우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작품에 대해 평가한 해가 1676년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해는 공교롭게도 2차 예송논쟁과 그로 인한 정치적 환국으로 서인이 주도권을 상실한 해였는데 그러한 시기에 다소 뜬금없이 그림에 대한 평을 했다는 것은 단순히 문인의 흥취에 의거한 것이 아닌 정치적 목적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이후 서인으로 분류되는 문인들이 반복적으로(1694년, 1704년) 신사임당의 (초충도)화풍을 칭송함으로서 율곡 이이의 학문적 정통성을 올리려는 시도와도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분명 뛰어난 작품입니다. 몇몇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을 평하면서 도식적인 구도, 단조로운 묘사를 지적하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평은 대상에 대한 치밀한 탐구를 기반으로 그려진 그림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신사임당의 대표작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당대의 신사임당 회화에 대한 인식과 오늘날의 인식이 전혀 상반된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또한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예술적 평가라는 것이 심미안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수단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림은 때로 정치적, 사상적으로 이용되어 그 형식이 가지는 고졸함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하고 반대로 뛰어난 묘사에 비해 저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그 배후에 지닌 정치적, 사상적 맥락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전통처럼 남아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바로 그러한 양상이 잘 드러나는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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