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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l 21. 2021

15-16세기 조선시대 어진제작 전통의 소멸


왕이 말하길, “열성조의 어진이 전부 33개가 봉안되어 있어야 하는데 33개가 아니다. 병화(임진왜란)이전의 것은 소실되었다고 해도 병화 이후의 선조, 인조, 효종, 현종의 어진은 어찌 없는 것인가?” 윤정현이 아뢰기를, “신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승정원일기, 헌종 11년 9월 25일



조선시대 어진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초상화 중 하나입니다. 비록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으나 경기전에 있는 태조 어진을 비롯해 몇몇 어진들이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현대인들은 조선 왕의 얼굴을 그림으로나마 만날 수 있습니다. 당대에 어진은 단순히 초상화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 조상을 모시는 제의적인 맥락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기에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어진에 관한 여러 행사는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사업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장 과거 왕들의 어진을 모사하는 작업에 있어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동원되었으며 여러 까다로운 절차들을 거쳐야지만이 왕의 얼굴을 모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복잡한 과정들은 빠짐없이 기록되어 오늘날 학자들에게 어진을 제작한다는 것의 무게감을 간접적으로 나마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혹자는 조선시대 어진의 사실적인 묘사에 경탄하며 그것들이 한국전쟁 시기 화마에 의해 소실된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특히 반쯤 불타버린 철종의 어진은 이러한 안타까움을 배가시켜주죠. 하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도 이미 많은 왕들의 어진이 사라진 상태였다는 점은 크게 주목 받지 못하는듯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남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는 점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듯 합니다. 초상화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던 조선시대에 막상 왕들의 어진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왜 없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오늘날의 미스테리는 아닙니다. 헌종 11년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 말기 왕실조차도 왜 과거 왕들의 어진이 남아있지 않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남아 있는 어진의 수가 역대 왕들의 수와 맞지 않는 것을 알고 당대에 유명한 고증학자였던 윤정현을 불러 사정을 물은 것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오늘날 한국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조선 중기 왕들의 어진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은 큰 관심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실화 혹은 전쟁과 같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없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애초에 그림 자체가 그려지지 않았던 것일까요? 학자들은 기록들을 살펴보며 그 이유를 규명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진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사상적, 정치적 맥락이 밝혀졌습니다. 이 글은 그러한 복잡한 맥락 중 일부분을 채택해 조선시대 어진 전통의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태조의 어진과 그것을 모시는 전각에서도 알 수 있듯 개국 초기 어진은 제의적 용도로 널리 이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진을 제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래 고려왕실에서부터 사용했던 불교적 전통 중 하나였습니다. 일찍이 고려 왕실은 사찰에 사찰과 같은 별도의 공간에 왕과 왕비의 영정을 봉안했는데 그러한 전통이 약간의 수정을 거쳐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던 것입니다. 성리학을 기본으로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러한 것을 좋게 볼 리 없었습니다. 당장 세종 대부터 왕의 얼굴을 그려 제의를 지내는 것에 비판이 가해지는데 주된 논점은 첫째, 그것이 불교적 속례이며 둘째, 설사 그것이 불교와 관계없더라도 그것이 실제 왕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로 지적했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 논점입니다. 이것은 회화라는 매체가 가진 태생적 한계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제례에 사용되는 재현 이미지 전반에 관한 당시 유학의 인식을 보여주는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은 사진이 아니었기에 화가가 대상을 옮기는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불가피한 생략, 왜곡이 발생하며 그로 인해 대상을 100퍼센트 똑같이 그려냈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재현된 인물화를 모시는 것은 조상을 모시는 것이 아닌 우상을 모시는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영정을 모시는 것이 조상을 모시는 올바른 예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진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들은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송대 성리학자들의 글을 인용합니다. 일찍이 송대의 유학자인 정이(程頤, 1033~1107)는 불교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제례 방식에 반대하여 신주를 모시는 방식으로 제례 할 것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논리를 위해 하나의 이론을 정초하는데 그것이 바로 ‘일호불사’론입니다. 일호불사는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時他人)의 줄임말로 1168년 정이와 정호의 발언을 모아 기록한 <이정유서>와 1175년 <근사록> 등 주희(朱熹, 1130~1200)가 편집, 저술한 몇몇 저서에서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한자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 터럭 한 올이라도 똑같지 않다면 그것을 진짜로 볼 수 없다는 뜻이지만 기실 실천의 영역에서 그러한 것이 가능할리 없으므로 지침이라기보다는 신주를 이용해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이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정이가 신주를 이용한 제례 방법을 옹호한 것은 당시 기층 민중뿐만 아니라 지배층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지고 있던 불교적 관습을 유교적 관습으로 바꾸고자 했던 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어진을 제작하는 관례에 반대하며 일호불사론을 꺼내들었다는 것은 불교적 함의가 담긴 영정을 이용한 제의 방식을 없애고 유교적 함의가 담긴 신주를 이용한 제사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주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사림들이 점차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성종 연간을 전후로 하여 언관들을 중심으로 일호불사론에 기초한 어진 반대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종 1년, 중종의 어진 제작을 둘러싸고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성종 이후 어진 제작의 관례에 있어 제례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어진은 으레 왕을 모시던 내시나 종친들의 기억에 의존해 그려졌는데 당시 언관들은 이렇듯 기억에 의존해 그리는 그림이 실제와 같지 않기에 어진 제작을 중단해야 하며 심지어 이미 제작한 어진까지도 봉안하지 말아야 한다는 매우 극단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공조 판서 허자와 호조 판서 임백령이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에는 진상(眞像)과 흡사하리라 생각하였으나 이제 봉심하니 평시와 닮은데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옛사람이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았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時他人)’라고 하였는데, 신들이 듣기로는 그림이 완성된 뒤부터 위에서 향을 사르고 받들어 공경하여 길이 사모하는 성의를 다하신다 합니다. 후세의 성손(聖孫)이 이어 받들 때에 중종의 어용이 이와 같으시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인종실록 1권, 인종 1년 3월 25일


공조판서와 호조판서가 말을 꺼낸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언관들 또한 현재 완성된 어진이 선왕과 닮지 않았으므로 어떠한 “조처”를 취할 것을 간언합니다.


대사간 이윤경(李潤慶)이 아뢰기를, "어정(御幀)이 조금만 닮지 않아도 이를 봉안하는 것은 매우 미안한데 더구나 용모가 매우 닮지 않은데이겠습니까. 수염 하나 머리털 하나만 닮지 않은 것을 선왕의 유상(遺像)이라 하여도 오히려 옛사람은 그르게 여겼는데, 후세의 사왕(嗣王)이 굳이 추모하여 효사(孝思)의 뜻을 붙여서 우리 어버이요 우리 임금이라고 여긴다면 이미 충효의 도리에 어긋남은 물론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령께서도 즐기지 않으실 듯합니다. 또 선왕께서 40년 동안 임어(臨御)하셨는데 어찌 어진(御眞)을 그리는 관례가 있는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리지 않은 것은 반드시 뜻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 이제 어찌 기억을 되살려 그린 닮지 않은 그림을 유상이라 하여 봉안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봉안을 멈추고 다시 조정과 널리 의논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신들은 벼슬이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므로 그것이 그른 줄 알고서는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종실록 1권, 인종 1년 3월 26일


말의 행간을 보았을 때 이 “조처”라는 것이 사실상 어진을 폐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0년 동안 재위하면서 어진을 하나도 그리지 않았던 중종의 예를 들며 어진 그리는 관례의 잘못됨을 이야기 한 것이 그 증거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인종은 그렇게 대신들이나 언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영정을 봉안하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었던 듯합니다. 인종은 이들의 주장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하며 영정 봉안을 강행합니다.


(왕이) 답하기를 “생존시에 그려도 다를 수가 있는데 더구나 추후에 상상하여 그린 것이겠는가. 그러나 말을 타신 영정이 비슷하고 전좌(殿坐)하신 영정도 대개는 닮았으므로 봉안하기로 이미 정하였으니 번복할 수 없다. 또 높은 곳에 걸어두어서 조용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소견이 각각 다른 것이다."

인종실록 1권, 인종 1년 3월 26일


인종 1년 중종의 어진 제작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신료들과 왕의 갈등은 성리학이 공고해지고 있었던 조선 사회에서 어진 제작 전통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때문에 학자들은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어진 제작 관행이 조선 왕실에서 사라진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東方 十八賢) 중 조선 초, 중기에 활동한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이황(李滉, 1501~1570),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이이(李珥, 1536~1584), 성혼(成渾, 1535~1598), 조헌(趙憲, 1544~1592), 김장생(金長生, 1548~1631), 김집(金集, 1574~1656),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초상화를 전혀 그리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서도 뒷받침되는 사항입니다. 다시 말해, 사림의 성장과 중앙정계 진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의 초상화가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공신 세력과 사림 세력이 공존했던 기간 동안 공신초상화의 형태를 통해 초상화를 남겼던 공신 세력과 달리 왜 사림 세력 주요 인물들의 당대 초상화가 없는지에 대한 설명도 가능해집니다. 정리하면, 15-16세기를 기점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의 주자가례에 대한 이해의 심화로 말미암아 어진 제작이 속례로 격하되고 이에 따라 왕실에서도 이러한 것을 한동안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작자미상, <송시열초상>, 1683, 비단채색, 국립청주박물관.

 


물론 이러한 전통은 17세기 이후 다시 부활합니다. 일호불사론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그것이 실제적인 지침이 아닌 당대에 성행하던 불교적 제례를 억누르기 위한 이론적 장치였다는 점이 송시열 등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 계열 인물들의 글에서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는 것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1680년 송시열이 정몽주의 후손 정찬휘에게 쓴 편지는 이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당시 정찬휘는 송시열에게 정몽주의 신주와 화상을 어떻게 봉안해야 하는지 묻기 위해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대해 송시열은 아래와 같이 답합니다.


불천위에 대해서는 주자가례에서 자세히 말했으니, 마땅히 묘소에 따로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셔야 한다. 다만, 노선생(정몽주)의 묘소 아래에는 이미 서원(忠烈書院)이 있으니, 또 별도의 사당을 세우면 중복되는 것 같아 어떨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응당 종가에 사당을 세워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영당에서 한 것처럼 하고, 신주와 화상을 이곳에 같이 봉안해야 한다.

송시열, <송자대전>, 권101


이처럼 송시열이 이처럼 신주와 화상을 함께 모시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존재합니다. 학자들은 17세기 이후 초상화라는 것이 조상을 배향하는데 있어서 실제적인 기능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초상화가 제의적 기능 이외에도 수기적 기능, 즉 기록의 측면에서 초상화가 효과적인 장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정이가 주장한 일호불사론을 기록한 것은 주희이지만 주희 자신이 이러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초상화로 조상을 모시는 것이 유학적 관점에서도 용인될 수 있는 제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왕실의 관행에도 영향을 주어 숙종 이후부터는 어진을 그리는 전통이 다시 부활해 다시 국가의 주요 사업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어진을 둘러싼 논란과 그것의 변천사는 그림이라는 것이 단지 미술사의 영역에서만 규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연구주제입니다. 그리고 제의 행위라는 것이 조선시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관습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조선 사회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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