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굽이치는 시간의 파도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다.>

by 이지영

살아 있음이 강하게 감각되는 순간, '나'는 현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 감각은 나를 관통해 온 시간 전체를 불러내며, 지금의 내가 단일한 순간이 아니라 누적된 지속의 결과임을 드러낸다. 프랑스 소설가인 마일리스 드 케랑갈이 2013년에 쓴『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원작으로 하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장기 기증이라는 비교적 낯선 소재를 다루는 1인극이다. 우란문화재단과 '프로젝트 그룹 일다'의 제작으로 2019년 초연된 바 있다. 2025년은 무려 다섯 번째 재공연으로 이것은 연극에서 이례적인 일에 해당한다. 제목만 봐서는 잔혹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이 연극이 다섯 번이나 재공연 되었던 매력은 무엇일까?



각자의 시간을 견뎌내는 사람들


연극은 교통사고를 당해 뇌사에 빠진 19세 청년 시몽 랭브르의 장기를 51세 심근염 환자 클레르에게 이식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24시간의 이식 가능 시간을 100분의 공연 시간 안에 맞춰 녹여낸 것이다. 시간은 이 연극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내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기도로 꽉꽉 채워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으로 뒤덮여 마치 멈춘 듯 느껴지기도 한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핑의 희열을 온몸으로 즐기며 살아있음에 대한 감각을 충분히 즐기던 시몽이었다. 시몽이 살아있음에 경이를 느끼는 연극의 첫 장면은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자세하게 묘사된다. 사실 인간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지속적으로 체감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누구나 심장의 박동이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시몽에게는 서핑을 하며 파도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 그렇다. 실제처럼 선명하게 넘실거리는 파도의 영상을 송출하는 대형스크린 앞에서 지금 이 시간, 살아있다는 감각으로 본인이 얼마나 충만해 있는지 섬세하게 묘사하는 시몽에게 이입되면 관객 역시 심장 박동이 자연스레 빨라진다. 하지만 모두에게 충만하던 그 시간은 교통사고 이후 딱 멈춰버린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의 시간은 파도와 친구들이 아닌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소생의학과 의사, 간호사, 심장 적출 전문의 등에게로 이양되어 버린다. 이들은 성공적인 이식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또 다른 시간 속을 달려간다. 정해진 시간 안에 장기 이식에 대한 가족의 동의, 장기 적출, 장기 이식 수술 등을 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반면, 시몽을 사랑했던 부모와 여자친구 등에게 이양된 시몽의 시간은 거의 멈춘 듯하다. 환희에 찬 시몽의 심장을 기억하던 뇌가 이제는 멈춰버린 시몽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여자친구인 줄리엣은 시몽과 함께 했던 만남들을 역행하며 시간을 되돌리려 애쓴다. 물리적으로 동일한 현재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체감하는 시간의 밀도와 방향성은 상이하게 작동한다.


또 다른 배우, 빛과 소리 그리고 영상


배우 혼자 열다섯 명의 역할과 내레이션을 감당한다는 것은 엄청난 내공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필자가 관람한 윤나무 배우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명의 배우도 오랜 관록과 배우로서의 다양한 역량을 자랑하지만 이런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배우들의 독보적인 기량으로 많은 부분이 채워지긴 하지만 이 작품에는 숨은 배우들도 존재한다. 숨 돌릴 틈 없는 극의 진행과정에 극적 상황을 조성하는 역할, 새로운 자극과 쉼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조명과 음향, 그리고 영상이다. 미니멀한 무대에서 새로운 장소로 전환될 때 대도구들이 아닌 조명만으로 장소성을 뚜렷하게 조직해 주었으며 등장인물의 심리가 급격하게 변화할 때 음향이 그 정동을 가시화하며 장면의 정서적 밀도를 높였다. 또 배우가 투사된 자신의 그림자를 마치 다른 인물처럼 대하는 부분의 연출도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특히 수술 장면은 이 연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데 배우의 손짓과 빛의 적절한 활용만으로 메스가 인체를 갈라 동맥과 정맥을 절제하고 아직 뛰고 있는 심장을 꺼내 봉합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관객은 시종일관 숨 쉬듯 연극놀이를 하고 있는 배우를 보며 그 너머의 상상을 나름대로 확장해 나간다. 배우 한 명, 책상 하나, 의자 몇 개뿐인 단출한 무대에서 우리는 삶의 아이러니와 한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심적 파동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장기이식을 둘러싼 상이한 관점들을 병치하는 한편, 극적인 국면에서 각 인물이 체감하는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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