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완열 May 17. 2022

늦은 오후의 단상

오전 아홉시 삼십분.

사무실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당직근무로 육체는 피곤하지만 정신은 더없이 맑다.


오월의 찬란한 햇살을 만끽하며 자전거 페달을 경쾌하게 밟는다. 바람이 시원하다.

이제 막 꽃이 떨어지고 연두색 잎을 뻗기 시작한 가로수가 우거진 거리에 진입한다.

숲에서나 느낄법한 초록잎의 향기가 마스크를 뚫고 내안으로 들어온다.


오늘은 당직근무 후 의무적으로 주어지는 휴일이다.

주말이 붙어 있었다면 당연히 집으로 복귀해서 '가장'의 온전한 의무를 다해야겠지만

타지에서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다.


가정을 이루기 전까지는 몰랐다.

휴가와 주말은 내 것이 아님을.


이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해보자. 식사메뉴 고르는 것보다 더 진지하다.

최적의 선택으로 최고의 효율을 뽑아야 한다.


책을 읽을까? 유튜브를 볼까? 운동을 할까?

잠을 잘까? 음악을 들을까? 글을 써볼까?

그림을 그릴까? 영화를 볼까? 청소를 할까?

선택지의 바다속에서 금쪽같은 시간이 흘러간다.


그래 오늘은 미뤄왔던 커튼을 달자!

정남향인 이놈의 사택은 놀라운 기능이 있다.

이른 아침이 되면 강력한 태양광선이 베란다와 창문을 뚫고 침대로 직행한다.

요즘 난 반강제적인 아침형 인간이다.


여름용 얇은 커튼을 달았다.

오후의 햇볕이 한결 은은하게 투과된다.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청소를 했다.

바닥이 더이상 버석거리지 않는다.

기분이 좋다.


아이패드로 재즈를 틀었다.

갬성이 2% 증가한 느낌적인 느낌이다.

기분이 좋다.


책을 읽었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역사의 역사'를 읽었다.

유시민 작가의 책은 대부분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은 희한하다. 졸리다.


오후의 시간이 늘어진다.

재미없는 활자 덕분일까?

수면부족 때문인지,

끈적한 재즈음악 때문인지,

오후의 햇살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나른하다.


달콤한 휴식시간은 상사의 전화 한 통으로 끝났다.

더 높은 상사의 엄청난 지시사항들을 전달하며,

오늘 회식 잊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지금 시간 오후 다섯 시.

여섯시에 있을 회식을 준비한다.

아 짜증나.


매거진의 이전글 주공아파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