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깊이 파고든 유기불안
가난했던 어린 시절,
사랑이라 믿었던 결혼,
그리고 자폐 아들과 함께한 긴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찾아가기 위해 글을 쓴다.
쓰는 건, 살아내는 일과 같다. -엣지있는 김작가-
어릴 적 우리 집은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엄마는 스무 살에 아빠에게 붙잡혀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스물한 살에 큰언니를, 스물셋에 둘째 언니를, 스물다섯에 나를 낳았다.
아빠는 여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외박과 바람을 일삼았고,
아내와 자식은 늘 뒷전이었다.
엄마는 하루 한 끼를 먹이기도 벅찼다.
동냥을 다니고, 남의 집 일을 도우며 하루 벌이로 하루를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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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 살이 되던 해, 엄마는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일곱 살, 다섯 살, 세 살. 그 어린 세 자매는 엄마가 출근하면 그대로 집에 남겨졌다.
차비도 없어 버스 한 번 타지 못한 엄마는
매일 걸어서 회사에 갔다. 1987년쯤, 보험료를 받으려면
직접 영수증을 들고 고객 집을 찾아가야 하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칼국수 한 그릇으로 버티며 걸었다.
밤늦게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어린 손으로 청소를 하고, 밥을 지어 먹었다.
하루하루가 버팀이었다.
엄마가 출근하면 세 자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를 견뎠다.
이웃과 정이 깊던 시절이었다.
가끔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를 챙겨주셨다.
배가 고프면 나는 나를 예뻐해 주던 이웃집 앞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면 한 끼쯤은 먹을 수 있었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나는 그 집 아기를 돌봐주며 밥을 얻어먹었다.
나중에 언니들이 말했다.
“그때 네가 밥 먹는 걸 보고 다행이라 생각했어.”
세 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는 보험 일을 계속했다.
아빠는 내가 초등학생이 되던 무렵 외국으로 나갔다.
일본을 거쳐 온두라스까지 갔고, 그곳에서도 또 다른 여자와 살았다고 했다.
결국, 우리 셋은 언제나 우리뿐이었다.
엄마가 지쳐 돌아오면
밥 짓는 것도, 청소도, 모두 우리가 했다.
아침엔 친구들이 나를 깨웠다.
빛이 들지 않는 방에서
아침이 오는 줄도 모른 채 잠들곤 했다.
학교에 갔다 와서, 저녁을 먹고, 잠이 들 때까지—
세 자매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가난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빠가 보내는 돈은 늘 모자랐고,
엄마는 혼자 세 아이를 키우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실적에 쫓긴 엄마가 자기 돈으로 보험을 넣곤 했다는 걸.
큰언니와 둘째 언니는 방황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귀신이 무서워도, 밤이 두려워도,
그 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렇게 스스로의 규칙을 만들었다.
규칙이 나를 지켜줬다.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으려 애쓰며,
조용히, 단단히,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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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 부산을 떠나며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
기숙사에서, 친구들과의 원룸에서,
처음으로 ‘나’의 공간이 생겼다.
매달 용돈을 받았지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총학생회 여성자치부장으로 일하며
장학금을 받아 학비를 채웠다.
그 이후로는 알바와 직장 생활로 스스로를 책임졌다.
기댈 곳 없는 삶, 언제나 혼자인 삶.
돌이켜보면 가족이 곁에 있었지만,
나는 늘 혼자였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든 버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리고 그때 만들어진 불안이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어릴 때부터 내 안에 뿌리내린 ‘유기불안’.
그건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