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시간의 한가운데서

by 엣지있는 김작가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신랑도 일이 바빠지면서 우리는 이사를 계획했다.


화성에 사는 큰언니 집 근처로 이사해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남편의 바람 때문이었다.


우리가 가진 돈은 전셋집에 묶여 있는

보증금 1억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7천만 원은 대출이었으니

이자만 내는 것조차 빠듯한 상황이었다.


그 무렵 화성에 살고 있던 이모가

급하게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우리에게 전세금으로 얼마를 줄 수 있냐며

그 돈만 받고 아파트에 들어와 살라고 제안했다.


이사 비용도 필요했고

그동안 생활비가 부족해 사용했던 돈을

정리하고 나면

8천만 원 정도를 전세금으로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모는 8천만 원에

화성에 있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내어주었다.


큰언니 집과는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이사를 했고,

신랑은 직장이 강남이라

매일 왕복 네 시간 가까이 출퇴근을 해야 했다.


그 무렵 신랑 역시

직장 생활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할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영업직으로 부서 이동을 한 뒤 회사를 나왔고,

옮긴 회사마저도

미래를 보고 계속 다니기에는

문제가 반복해서 생겼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나는 신랑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돈만 쫓기보다는,

재미를 느끼고 배우면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일을 하길 바랐다.


돈 걱정에 지쳐 있는 신랑에게

돈은 나중에라도 벌 수 있다며

지금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고 매일같이 이야기했다.


그 당시 신랑은 정말 다양한 일을 했다.

서른하나의 나이였고,

해본 일보다

해보지 않은 일이 더 많을 때였다.


기억하기로는

그 시기에 네 번 정도 직장을 옮겼고,

네 번째 회사에서

약 1년 정도 자리를 잡았다.


그 회사는

신랑이 처음으로 욕심을 느낀 곳이었다.


구인을 하지 않던 회사였지만

신랑은 홈페이지를 통해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직접 메일로 보냈고,

대표의 연락을 받아 면접을 본 뒤

한 번에 합격했다.


게임회사 마케팅 부서였다.


하지만 그곳은

야근이 일상이었다.


내 배는 점점 불러오고

몸은 무거워졌고,

그만큼 마음도 점점 외로워졌다.


신랑은 처음 배우는 게 너무 많아

깐깐하고 빡빡한 사수 밑에서

매일 혼나고, 배우고,

지쳐가는 시간을 반복하고 있었다.


큰언니 근처로 이사 오면

조금은 덜 외롭고 덜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큰언니 역시 셋째 출산 후

넷째를 바로 임신한 상황이라

나 역시 언니를 도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신랑은 신랑대로 지쳐가고

나는 나대로 지쳐가던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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