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늘 바빴고
야근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차장은 꼰대 중의 꼰대라
정시에 집에 가는 꼴을 못 봤다.
나는 대리라는 직책으로
차장과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중간다리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하나.
팀의 막내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차장이 먼저 “퇴근하세요”라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늘 눈치를 봐야 했다.
결국 내가 나서서 아이들에게 일이 남았는지 묻고
차장에게 말했다.
“더 시킬 일 없으시면
애들 먼저 퇴근시킬게요.”
그렇게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는 차장의 눈밖에 나 있었다.
부딪히는 일도 잦아졌다.
그 때문이었을까.
스트레스와 피로가 쌓이던 어느 날부터
몸이 이상했다.
빈혈이 있는 것 같았고
소화가 되지 않아
점심 한 끼를 먹는 것도 버거웠다.
제안서를 쓰는 날이면
밤을 꼬박 새우고
집에 잠깐 들러 씻고
다시 출근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너무 힘들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임신인가?
약국에 들러 임신 테스트기를 사서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테스트기를 사용했다.
선명한 한 줄.
임신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가 아픈 걸까.
테스트기를 변기 뚜껑 위에 올려두고
출근 준비를 하며 씻었다.
다 씻고 나와
버리려고 다시 보니
아주 흐릿하게 줄이 하나 더 보였다.
정말 흐릿해서
물이 튄 건가 싶을 정도였다.
다음 날, 다시 검사했다.
이번에도
선명한 한 줄,
그리고 흐릿한 한 줄.
이건 혼자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신랑에게 말해야 했다.
같이 산부인과에 가서
확인해봐야 했다.
그날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임신한 것 같아.”
“……?”
신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많이 놀란 표정으로
그냥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아마 너무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2세 소식에
당황했던 것 같았다.
사실 우리 둘 다
이렇게 쉽게 임신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했다.
“안 기뻐?”
“아니, 기쁘지.
너무 놀라서 그래. 진짜야.”
이미 늦었다.
마음이 상해버렸다.
나 역시 쉽게 임신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기뻐해주길 바랐다.
다음 날,
신랑은 미안했는지
내가 좋아하는 장미꽃다발과
직접 쓴 편지를 건넸다.
임신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신랑 이름이 종영이라
나는 그를 ‘쫑’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태명은
쫑의 아이, ‘쫑아’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테스트기에 선명한 두 줄이 아니었기에
기쁨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다.
나는 다낭성 증후군을 앓고 있었고
큰언니 역시 이 병으로
네 번의 유산을 겪었다.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를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왔는지
곁에서 지켜봤기에
더 불안했다.
드디어 산부인과에 가는 날.
집 근처 병원에서 검사를 했고
임신이 맞다는 말을 들었다.
다만 너무 초기라
지금은 초음파를 보는 게 의미 없으니
한 달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아기에게 이상이 있는 건 아니라는 말에
일단 안심이 되었고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내가… 엄마가 된다니.
그땐
기쁨 반,
걱정 반이었다.
배란이 잘 되지 않는 몸이라
의사가 “피임하지 말라”고 했던 터라
임신을 계획하지 않은 건 맞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결혼한 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우리 형편에
아기를 낳아도 괜찮은 걸까.
걱정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기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기에
임신은
걱정보다 기쁨이 조금 더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산부인과를 다녀온 뒤
가족들에게 소식을 알렸고
습관성 유산을 겪었던 큰언니는
내 직장생활을 많이 걱정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신랑도 말했다.
“아기를 위해
일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당시 일은
야근과 밤샘이 일상이었고
입덧이 심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다시 직장을 내려놓았다.
신랑 외벌이로
생활은 빠듯했지만
최대한 아껴 쓰며
우리는 그렇게
쫑아의 탄생을 기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