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를 읽고
유럽 여행을 하며 여러 미술관을 방문했었다. 유명하기로 손꼽히는 큰 미술관들도 갔었고, 유명한 작품도 제법 많이 봤다. 개중 유달리 기억에 남는 곳이 독일 에센에 있던 Museum Folkwang이었다. 규모가 엄청나거나, 저명한 작품이 많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전시관이 잘 정돈된 느낌을 받았다. 관람하기에 참 좋은 곳이라고 해야 할까? 관람 코스도 깔끔했고, 달려 있던 작품 해설들이 상당히 쏠쏠했다.
그 미술관에서 고갱의 작품을 몇 점 관람했었다. 그전까진 솔직히 고갱에 큰 관심이 없었다. 동시대의 여러 화가들 중에서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갱의 화풍이 좀 유별나다고는 생각했던 것 같다. 작품을 슬 보고 넘어가려다가, 옆에 엄청난 길이의 해설이 달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무슨 말을 저렇게 길게 해뒀을까, 싶어서 영문 해설을 무척 열심히 읽었다.
Too little is known yet about the life of the woman whose name literature records as
Tohotaua (c. 1882 - 19??). Unlike the narratives surrounding Gauguin describe it, she probably belonged to the higher society on the island of Hiva Oa because she was married to a taua, a key figure in the religious, social, and cultural life of ancient Polynesian society.
Gauguin used a photograph of Tohotaua as a model for this painting. The photographic portrait was already posed; in his painting, however, Gauguin altered Tohotaua's image even further: with the feather object in her hand and the Greek-looking dress that exposes her breasts, Gauguin's depiction conforms to the sexualized stereotype of the young Polynesian woman that was shaped in the 18th century by the accounts of seafarers such as Louis-Antoine Bougainville and James Cook.
Jeune fille à l'eventaik is therefore less a portrait of Tohotaua than an image of the white male gaze on a Polynesian female body rendered nameless.
The portraits Paul Gauguin created in context with his stays in Polynesia are in many cases not true-to-life depictions of people. Instead, the paintings are invented, highly complex scenes in which Gauguin assembles elements of different cultures.
For this reason, paintings such as the one exhibited here can sometimes still not be clearly deciphered in terms of content. As Elizabeth Childs has described, Gauguin deliberately used Polynesian references to further fuel the notion of a mysterious island paradise in the Pacific among his European audiences, thus making his art interesting. The term 'barbares', which Gauguin uses in his title, is viewed critically today, which is why there is no corresponding German translation on the work's label.
고갱의 그림 두 점에 각각 달려 있던 해설이다. 그림이나 작가의 배경에 대한 설명일 줄 알았는데, 냉소적인 비판에 가까웠다.
요약하면, 고갱이 그렸던 타히티의 여인들은 그들의 실제 모습과는 동떨어진, 허구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에는 ‘젊은 폴리네시아 여성’을 보는 백인 남성의 시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해설에 따르면, 고갱은 유럽 관객들 사이에서 태평양의 신비로운 섬 낙원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부추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폴리네시아적 요소들을 활용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예술을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을 넘겨보면서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지점인지라 머리가 띵했다. 이 그림들에 원주민 소녀들을 바라보는 성적인 시선과 더불어 식민지주의가 그대로 드러나 있구나, 싶어지니 고갱에 대한 반감이 훅 올라왔다. 무릇 사람은 시대상에 맞춰 생각할 수밖에 없다지만, 이 해설을 읽고 작품을 다시 볼 때 드는 불쾌함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이런 담론 자체를 이리 뒤늦게 알게 되다니!
아무튼, 고갱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해서인지 초장부터 소설 속의 스트릭랜드가 썩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읽다 보면 납득이 갈까, 싶었는데 되려 반감이 더 늘었다. 책 뒤편의 해설에 언급된 서머싯 몸의 여성 혐오증 이야기까지 보고 나니, 이 반감의 원인을 알 것 같기도 했다. 21세기에 이 책을 읽는 동양인 여성 독자로써는 어쩔 수 없는 반감이지 않을까 싶다.
책 전반에 걸쳐서 든 의문은, ‘스트릭랜드가 추구하던 궁극의 아름다움, 미라는 것이 실존하는 가치인가?‘ 하는 점. 책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쫓듯 그는 아름다움을 쫓는다는 구절이 있다. 그가 좇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 세속 세계와 대비되는 자연 상태의 무언가. 책 속에는 그걸 보고 경탄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존재하는가? 이는 결국 진리가 존재하느냐? 와 유사한 맥락의 질문인 듯 하다. 스트로브가 그리는 그림은 정말 아름답지 못한가? 그 그림이 아름답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며, 세상과 떨어진 곳에서 그려진 스트릭랜드의 그리는 그림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스트릭랜드가 마르세유 항구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고, 타히티의 숲속에 틀어박혀서 그림을 그렸다는 게 중요한 지점인가?
책의 화자 역시 스트릭랜드와 같은 백인 남성.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경탄하곤 한다. 신비감은 두려움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조장한다. 그걸 이용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인 것이고, 또 고갱이 그리는 타히티의 모습이 아닌가.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아름답다 여기는 것이야말로 정말 편협한 시각이 아닌가, 싶어진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들의 삶이 강렬하고, 거칠고, 야만적이고, 다채로우며, 쾌활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내가 알고 있던 마르세유, 감정 표현이 유난스럽고 명랑하며, 부자들로 바글거리는 안락한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가득 찬 마르세유는 그저 단조롭고 평범한 도시로 여겨졌다. 나는 니콜스 선장이 묘사한 광경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이런 묘사들을 읽다 보면 화자의 시선이 소설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무언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수직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상류층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이상화된 하층민의 모습 같달까? 양귀자의 <모순>에나오는 이모가 떠오르기도 한다. 가진 쪽에 서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다소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이 책 속 화자와 <모순> 속 이모가 가장 다른 점은, <모순> 속의 이모는 그 시절의 여성이기에 그런 감상을 가지는 게 이해가 된다는 점. 그와 달리 이 책의 화자는 사회적 계급으로 치면 최상위에 있는, 20세기의 백인 남성이기에 저런 감상들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게 다가온다.
화자는 초반부에 신격화된 이미지를 지우고 스트릭랜드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책을 읽을수록 화자야말로 스트릭랜드를 다른 방식으로 미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든다. 후반부에 가서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장면들에선 점점 스트릭랜드라는 사람을 그저 속세의 규칙들과는 좀 맞지 않았던, 신비로운 천재 예술가 쯤으로 묘사하는 게 노골적이라고 느껴졌다. 고갱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책을 읽으니 이런 일종의 미화가 더 불쾌하게 와닿았다.
예술가의 고뇌와 미의 추구,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속세로부터의 탈출. 우리가 시행하지 못할 것들을을 주저 않고 대신 수행해주는 스트릭랜드는 독자로 하여금 일종의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맥락에서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다. 거침없이 규율을 무시하고 예술을 좇는 스트릭랜드는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 전반에 걸쳐 있는 미묘한 불쾌감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들이 좇는 아름다움이란 누구의 전유물인가?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