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겐하임 뮤지엄
캐리가 마릴린 먼로의 시그니쳐 포즈로 휘날리는 치마를 붙잡는다. 강풍에 떠밀리듯이 뛰어와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유리문에 가로막혀버렸다. 마침 휴관일이다.
‘그나저나 저 하얀 건물은 정말 멋지다. 뉴욕은 건물도 작품인가보네. 저런 곳에 들어가려면 캐리처럼 옷을 잘 차려입고 마놀로블라닉 하이힐을 신어야 하나보구나.’
구겐하임 미술관을 처음 본 것은 2000년대 초, <섹스앤더시티>에서였다. 당시는 현대미술도, 아니 미술 자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을 때였지만 아무 배경지식이 없이도 저 건물의 흰색 나선형 디자인이 굉장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뉴욕에 가게 되면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멋진 건축물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이다. 지금 봐도 세련된 디자인의 건축을 1959년에 완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러한 파격적인 디자인이 60년 전에 조용히 수용되었을 리가 없으니, 이를 의식한 솔로몬 구겐하임은 유언장에 본인이 죽더라도 원 디자인을 변경하지 말고 건축을 마무리하라고 적었다고 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정식 명칭은 Soloman R. Guggenheim Museum인데 보통은 뉴욕 구겐하임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베니스 구겐하임이라고 부르는 페기구겐하임 컬렉션 Collezione Peggy Guggenheim이 이탈리아에 있고, 2013년에 문을 닫았지만 베를린에는 도이치 구겐하임 Deutsche Guggenheim이 있었으며, 스페인에는 구겐하임 빌바오 Museo Guggenheim Bilbao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빌바오는 리처드 세라, 제프 쿤스, 마크 로스코 등 동시대미술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덕에 현대미술계에서 핫한 장소가 되어, 미술관 덕에 도시가 재생된 좋은 예시로 꼽힐 정도이다. 빌바오 구겐하임 때문에 나도 빌바오를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2025년 완공을 목표로 구겐하임 아부다비 Guggenheim Abu Dhabi가 건설 중이기도 하다. 미술계에서 구겐하임이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하다.
토마스 크렌스
이 화려한 글로벌 구겐하임을 이끈 장본인이 바로 토마스 크렌스 관장이다. 2008년까지 20년간 관장을 역임하는 동안 괄목할만하게 증가한 기부를 토대로 공격적인 운영을 했기에 CEO형 관장이라고 평가받는다. 가장 큰 성공과 비판을 함께 받은 전시는 1998년에 개최된 <The Art of Motorcycle>인데, 114대의 모터사이클을 전시하며 200만 관객을 동원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동시에 BMW를 대놓고 광고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Africa: The Art of a Continent>나 <China: 5,000 Years>와 같은 블록버스터 전시나 로이리히텐슈타인, 매튜바니, 로니 혼 등 굵직한 현대미술가들의 회고전을 진행했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중국현대미술가 최초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한 차이궈창의 전시였고, 이 전시는 내가 석사학위 연구주제로 차이궈창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내 연구의 주제가 중국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중국 내부와 서구의 시각의 차이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페기 구겐하임
이곳은 솔로몬 R 구겐하임이 소장한 작품을 기반으로 세워진 미술관이지만, 그 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있으니,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인 페기 구겐하임이다. 그녀는 뒤샹, 막스 에른스트, 르네마그리트, 피에 몬드리안, 자코메티, 파울클레, 마크 로스코, 프란시스 베이컨, 잭슨 폴록 등 입체파, 추상,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추상미술에 대한 영향력 있는 후원자이자 컬렉터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당시에 태동하고 있던 현대미술을 전통적인 미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계몽의 목적으로 이를 전시하기도 한다. 바로 <퇴폐미술전>이다. 현대미술은 아주 쉽게 나치의 표적이 되었고 미술작가들은 자연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뉴욕으로 망명을 떠난다. 이때 유럽을 떠나온 예술가들을 품고, 그들의 아지트를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페기 구겐하임이다. 미술의 중심이 19세기 파리에서 20세기 뉴욕으로 넘어온 시기이다.
그녀의 자서전에 의하면 페기의 조부모는 가난했지만 뉴욕에서 사업을 일으키셨고, 아버지 대가 되면 부유한 유대인 가족이 된다. 덕분에 그녀는 꽤 수준 높은 문화예술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가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사망하면서 상속받은 돈으로 그녀는 파리로 떠나 그렇게도 좋아하는 예술에 푹 빠져 산다. 파리에서 시인과의 이혼 후에는 런던으로 가 갤러리를 열고 초현실주의자를 밀어줬다. 마르셀 뒤샹이다. 더 나아가 추상표현주의는 패기 구겐하임이 아니었다면 성장하지 못했다고 일컬어지기까지 한다. 잭슨폴락, 마크로스코, 윌렘드쿠닝이 그렇다.
기획전
구겐하임을 방문하기 전에는 모마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처럼 소장품에 큰 기대를 하고 갔다. 세계적인 후원자이자 컬렉터였던 페기구겐하임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 가보니 이 곳의 소장품이 전체 전시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는 기획전이 탄탄했다.
내가 뉴욕을 방문한 9월에는 마침 9월 1일에 시작한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전이 열리고 있었다. 국내에서 쉽게 접해서 무관심했던 작품들이 외국에 전시되어 있으니 괜히 더 꼼꼼히 보게 된다.
그 밖에 베네수엘라에서 활동한 독일계 작가 거트루드 골드슈미트의 <Gego: Measuring Infinity> 와 미국 작가 사라 제의 <Sarah Sze: Time Lapse>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둘 다 여성작가이고, 전통적인 미술의 방식인 회화가 아닌, 기하학적 조각 kinetic sculpture 과 장소특정적 작업 site specific installation 을 한 다는 것이 독특했다.
세련된 화이트 큐브, 아니 화이트 스파이럴에서 작품에 흠뻑 취한 후 센트럴 파크로 가서 뉴요커처럼 드러누워 쉬었다. 나는 공원이랑 미술관을 다 가진 어퍼이스트 사이더다! 라고 주문을 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