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트 보니것, 『제5도살장』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든다. "우연이 허락한다면."
이 변변찮은 작은 책이 돈과 불안과 시간이라는 면에서 나에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 말하기는 싫다. 23년 전 제2차세계대전의 전장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드레스덴 파괴에 관해 쓰는 게 쉬울 거라 생각했다. 그냥 내가 본 것을 전하기만 하면 되니까. 게다가 걸작이 되거나 적어도 큰돈을 손에 쥐게 해줄 거라 생각했다. 주제가 워낙 거대하니까.
그러나 그때 내 마음에서는 드레스덴에 관한 말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 어쨌든 책 한 권이 될 만큼은. 하긴 아들들이 다 장성하여, 기억과 팰맬 담배만 남은 늙은 등신이 된 지금도 말이 별로 나오지는 않는다.
내 기억에서 드레스덴 부분이 얼마나 쓸모없었는지, 그럼에도 드레스덴을 글로 쓰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하다보면, 유명한 오행 속요가 떠오른다.
(중략)
설사 전쟁이 빙하처럼 계속 오지는 않는다 해도, 평범하고 오래된 죽음은 계속 있을 것이다.
- pp. 14~16
책을 두 권 가져갔다. 원래는 비행기에서 읽을 생각이었다. 하나는 시어도어 레트키가 쓴 『바람에 실려온 말』이었는데, 다음은 거기에서 발견한 구절이다.
자려고 깨어나, 나의 깨어남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두려워할 수 없는 것에서 내 운명을 느낀다.
가야만 하는 곳에 감으로써 배운다.
- pp. 35~36
셀린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용감히 싸운 프랑스 병사였다 - 그러나 두개골이 금이 가고 만다. 그뒤로 그는 잠을 자지 못했고, 머릿속에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의사가 되어, 낮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밤에는 내내 괴상한 소설을 썼다. 죽음과 춤을 추지 않고는 어떤 예술도 불가능하다, 그는 그렇게 썼다.
- p. 36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 p82
우리 트랄파마도어인은 그것을 하나씩 차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꺼번에 읽습니다. 그 모든 메시지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다만 저자는 모두 신중하게 골랐지요. 그래서 모두 한꺼번에 보면 아름답고 놀랍고 깊은 삶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고, 서스펜스도 없고, 교훈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에서 사랑하는 것은 모두가 한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경이로운 순간들의 바다입니다.
- p116
"그건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안 보고 말지요. 무시해버립니다. 우리는 기분좋은 순간들을 보면서 영원한 시간을 보냅니다 - 동물원의 오늘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멋진 순간 아닌가요?"
"그렇죠."
"그게 지구인이 배울 수도 있는 점 한 가지입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면요. 끔찍한 시간은 무시해라. 좋은 시간에 집중해라."
- p151
EVERYTHING WAS BEAUTIFUL, AND NOTHING HURT.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어떤 것도 아프지 않았다.
- p157
그러나 글쓰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보니것은 학과 공부보다는 대학 신문 일을 하며 글을 쓰는 데 더 열심이었고, 게다가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쟁의 열기가 지배하던 이 시기에 자신의 미래를 예고하듯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 「해설」, p269
보니것의 경우는 유럽으로 가기 직전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보니것의 부모는 둘 다 19세기 미국에 이주한 독일인들의 후손으로, 각각 건축과 양조를 바탕으로 꽤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금주령과 대공황으로 사업 기반이 무너지면서 가세가 기울어, 세 자녀 가운데 막내인 보니것이 성장할 무렵에는 과거의 부유한 생활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니것 자신은 날 때부터 그런 형편이었으니 자신의 경제적 환경을 크게 의식한 것 같지 않지만, 부모는 달랐다. 아버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남편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그 어머니가 보니것이 유럽으로 떠나기 전 어머니의 날 무렵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 「해설」, p270
이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김뭉치의 브런치를 구독해주세요.
이 글을 읽고 김뭉치가 궁금해졌다면 김뭉치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주세요.
https://www.instagram.com/edit_or_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