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영 소설
1
사람들은 말하곤 하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던 골고다 언덕에, 부처가 명상에 잠겼던 보리수 앞에, 마호메트가 계시를 들었던 히라산 동굴 앞에, 사진기를 든 관광객들이 바글거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인류가 미래의 그 어느 시간에든 시간여행기(時間旅行機)를 만들지 못한다는 증명이 된 것과도 같다고.
요람에 누운 히틀러를 찾아온 암살자가 없었던 것만으로도,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탈출시키러 온 이스라엘 군대가 없었던 것만으로도, 노예선에 실려 끌려가는 흑인들을 찾아온 국제 인권단체가 없었던 것만으로도, 1, 2차 세계대전 그 어느 전장에도 조국의 역사를 바꾸러 온 미래의 지원군이 없었던 것만으로도 말이지. 트로이 전쟁과 적벽대전 한복판에 노트북을 들고 뛰어다니는 종군기자들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말이야.
고흐는 결코 가난하게 살지 않았을 거야. 그가 붓을 씻은 걸레 한 조각이라도 구하러 미술상들이 몰려들었을 테니까. 모차르트도 장수했을 거야. 진료가방과 수술도구를 든 의사들이 죽어가는 그의 옆에 구름처럼 모였을 테니까. 솔거의 노송도를 찾아, 《유기》, 《신집》, 《서기》 같은 역사서를 구하러 박물관장들이 다투어 몰려가겠지. 이 세상에 소실된 역사적 유물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불행하게 살다 간 천재란 존재할 수도 없을 거야.
경찰은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막을 수 있겠지. 법정공방도 진실 규명도 필요 없을 거야. 재판은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을 직접 보면서 열리겠지. 운전자들은 추돌사고 전에 도로국의 연락을 받을 거고, 소방관들은 불이 나기 전에 문을 노크하고 들어와 담뱃불을 끄고 가스를 잠글 거야.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부모의 품에 안길 거고, 길을 잃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겠지.
그러니 우리는 시간여행기를 만들 수 없을 거야! 누구든 그 결과를 알았다면 다른 방법으로 했을 일들이, 수많은 시행착오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역사에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살아오며 수없이 많은 실수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이라도 되돌리고 싶은 후회스러운 순간에 그 누구도 나타나 경고해주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증명된 것과 같아.
그래도 우리는 연구를 계속했단다. 외부에는 '이론을 쌓는 작업'이라고 했어. 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화학의 기초를 다진 연금술사들처럼, 영구운동기관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물리학의 기초를 다진 19세기 학자들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쌓게 될 것이라고.
물론 우리는 그렇게 얌전한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어. '정말로' 시간여행기를 만들 생각이었단다.
- pp. 19- 21
그게 우리가 보는 세상의 전부야. 사람은 자신이 관찰한 것밖에 알 수가 없어. 누구나 일생 자신의 인생밖에 살아본 적이 없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온 세상을 보고 온 것처럼 큰소리치곤 한단다.
- p. 31
내가 시간여행기를 써서 1979년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해보렴. 나는 내가 살던 시대까지의 과거를 모두 알아. 그리고 나는 일어난 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나는 곧 대통령이 암살당할 것을 알고,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2008년에 금융위기가 찾아올 것을 알아. 모두 이미 일어난 일이야. 나는 원하기만 한다면 신문자료나 기록을 동원하여 얼마든지 더 자세한 미래를 알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1979년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의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었어. 그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파괴할 수도 있었어. 누구든 사랑할 수 있었고, 미워할 수도, 죽일 수도 있었지. 그런데 그의 시공간에 갑자기 내가 나타난 거야. 그 사람은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나도 그를 만나지 않았어. 나는 단지 잠깐 그 시공간에 출현했을 뿐, 미래에 영향을 미칠 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 순간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어쩌면 갖고 있다고 착각했던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는 거야.
이제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난 일에 불과해. 그는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일을 할 것이고, 예정된 사람과 결혼하여 수많은 유전자 중 예정된 유전자를 택해 아이에게 전달하겠지. 그의 자유의지는 끝나버렸고, 가능성으로 열려 있던 미래는 이제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좁은 길처럼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거야.
그런 일이 가능할까?
미래에서 한 명의 사람이 날아온 것만으로, 시공간 전체가 자유의지를 잃게 되는 일이.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던 인류가 이제는 운명의 노예가 되어, 대본대로 행동하는 기계처럼 살게 되는 거야. 그런 일이 가능할까?
우주가 끝나는 날에, 시간이 끝을 고하는 날에, 단 한 명의 사람이(사람이 아니어도 좋겠지) 우주가 시작되던 지점으로 시간 이동을 하는 것만으로, 그 우주의 모든 역사가, 별의 탄생과 소멸이, 수억의 행성에서 앞으로 살아가고 진화하고 자손을 낳고 멸종해갈 모든 생명의 역사가 결정되어버리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훈은 말했어. 그럴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가능성이라는 말은 훈이 좋아하는 말이지. 훈은 어느 한쪽으로 말하는 법이 없어. 또 그것과 반대의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그보다 약간 더 높다고 했어. 왜냐하면 고정된 것은 고정되지 않은 것보다 불완전하며, 또 불안정하기 때문에…….
-pp. 39-41
인식단위가 작은 게 아닐까요? 맨날 그러잖아요. 애들은 다 똑같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 여자는 똑같다, 남자는 똑같다, 엄마는 똑같다, 자식은 똑같다. 얼마나 인식 범위가 좁으면 그 수없이 많은 파형이 다 똑같게 보일까요? 세상을 평균값 하나로밖에 보지 못하나 봐요.
- p. 56
시간여행기는 처음에 사람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생겨났을 거야. 늙은 사람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며 돌아보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병을 만들고 시간선을 휘게 만들었을 거야.
- pp. 58-59
나는 어떤 세상을 보았어. 그 시대에는 시간여행기가 사람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져 있었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대에서 도망쳐 다른 시대로 갔어.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함께 갖고 왔지. 낡은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그 시대에 뿌려놓았어. 먹물에서 도망쳐 나온 먹처럼, 먼지 구덩이에서 나온 먼지 알처럼.
하지만 아무도 자신들의 시대에서 도망칠 수 없었어. 그들이 싫어했던 모든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이었으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시대에서 온 것을 기억하지 못했어.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시대를 읽지 못하고, 자신들이 떠나온 시간에 머물렀지.
과거에 사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자신들보다 영리한 줄 모르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과거의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었어. 자신들이 아는 것을 아이들이 모두 아는 줄도 모르고, 자신이 경험한 것이 모두 지나간 시대의 것인 줄도 모르고, 너희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옭아매고, 어리석은 일에 시간을 들이게 하고, 낡고 고루한 가치관을 강요하며 자신들이 너희 인생의 선배고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인 척했어. 자신들이 과거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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