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독서

by 김뭉치
"산티아고를 걷는 게 특별했다기보단, 이제 어떤 길을 걸어도 산티아고를 걷던 마음가짐으로 걸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 김도영, <나의 힘은 책으로부터>,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 23.


머릿속에서 형체 없이 떠돌던 의문의 흥얼거림이 실제 '소리'로 변하는 과정이 매번 신기하기만 합니다.


- 김도영,<오해 1. 취미>,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 25.


"전 그저 와인이 겪었을 삶을 생각해봐요. 포도가 자라던 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상상해보는 거죠. 햇볕은 어땠을지, 비는 충분히 내렸을지, 포도를 기르고 수확하는 사람들은 또 어땠을지 말이에요. 그런 와인은 변화무쌍할 수밖에 없죠. 와인을 언제 오픈하느냐에 따라서도 맛이 제각각이니까요. 그건 '와인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전 그게 맘에 들어요."


- 김도영,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왜 좋아하는지>,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p. 69-70(2004년 개봉 영화 <사이드웨이> 중 영어교사이자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 마일즈가 와인을 사랑하는 마야에게)


그리고 이제 이 키워드별로 연관되는 이미지를 계속 수집하고 정리해보세요. 그런 다음 스스로에게 자주 노출시키는 실험을 해보는 거죠. 화사한 봄날의 이미지 대신 차분한 모노톤의 이미지 위에 피크닉이란 단어를 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기존의 영화 포스터 중 제목을 피크닉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게 있을지, 웹 사이트 이름이 피크닉이라면 어떤 물건과 서비스를 파는 곳일지, 내 생각을 하나씩 정교하게 디자인해보면 텍스트에서 출발한 심상이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저는 이 '피크닉'에 대해서 여러 가지 아이데이션을 해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뜻밖에도 우리가 피크닉이란 단어로 연상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준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풍 가기 하루 전의 설렘, 애인을 위해 도시락을 준비할 때의 즐거움, 어떤 옷을 입고 갈지 날씨는 어떨지 길이 막히지는 않을지, 온통 신경이 내일을 향해 있는 그 마음들은 모두 피크닉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것들이니까요. 그래서 '피크닉=준비의 즐거움'이라는 기준점을 잡고 하나씩 생각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어요. 그 결과 또한 기대 이상이었고요.


- 김도영, <영감을 풀다-생각의 숙성>,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 141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크리에이티브란 무엇을 떠올리냐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 풀어내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김도영, <영감을 풀다-온몸 투구>,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 146


우아한 형제들의 김봉진 대표님은 SNS를 통해 늘 책 이야기를 하십니다. 책에 관해 포스팅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김봉진 대표님이 책을 보는 관점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항상 '일'과 '사람', '사회'에 대한 밸런스를 유지하며 책을 읽으신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기업의 본질인 경영도 중요하지만 내 구성원들을 어떻게 대하고 성장시킬 것인지, 나아가 나와 우리는 사회에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흔적이 보입니다. 그래서 한때는 김봉진 대표님이 추천하는 책들을 따라서 함께 읽어본 적도 있어요. 그럴 때면 서로 다른 회사에 있지만 마치 카페에서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눈 사이처럼 그 사람의 렌즈를 잠시 빌려 쓴 느낌이 듭니다. 푸드테크 스타트업의 대표이자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실천가이면서 책을 사랑하는 애독가로 저를 '위치 이동'시켜보는 거죠. 그럼 자연스레 관점도 따라 이동하게 됩니다.


- 김도영, <모두가 에디터인 세상-관점: 태도에 대하여>,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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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에디팅의 화룡점정은 다름 아닌 '배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놓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죠. 마치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순서에 맞게 전시하고, 화살표를 이용해 동선에 따라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요. 내가 선택하고 고른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면 좋겠는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 빈부격차, 계급갈등이라는 한없이 오래된 소재도 봉준호 감독이 설계한 '수직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거죠.

앞에서 설명한 '관점'과 '주목'의 단계가 다른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었다면, '배치'만큼은 에디터의 주도적 역할이 큰 단계입니다. 따라서 직접 배열하고 부수고 다시 배열하는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함이 분명하죠.


- 김도영, <구성: 배치에 관하여>,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p. 260-261


제 지인분 중에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시간을 이용해 글쓰기 연습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주말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은 다음, 점심시간이 돌아오기 전까지 2-3시간 정도 글을 쓰는 연습을 하는 것이죠.

왜 이 시간을 택했냐고 물었더니 '자기 인생에서 가장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버리는 시간대라서'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침 먹고 나면 또 졸려서 그냥 자버리거나 TV에서 영화 소개 프로그램 하나 봤을 뿐인데 다시 점심시간이 되는 게 너무 아깝고 무서웠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짧은 글이라도 써보자는 마음으로 루틴을 시작한 거죠.

그러니 혹시 여러분도 주말에 조금 의미 있는 루틴을 짜보고 싶은 시간대가 있다면 그 타이밍을 공략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김도영, <다음은 '주말 루틴 만들어보기'입니다>,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 274


정확히 말하자면 글로서 생각을 구체화하고, 다듬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취미가 아닌 일로서, 소질이 아닌 기술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지죠.

사실 제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거나, 흩어져 있는 것을 모아 재정리하거나, 가장 적절한 곳에 가장 적절한 것을 가져다 놓는 일들입니다. 언뜻 들으면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설명 같지만 실제 업의 본질이 그렇습니다. 다만 저 일들이 여러 갈래로 가지치기하며 구체적인 업무의 모습을 띨 뿐이죠.

그렇다 보니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원형에 가까운 본질들을 어떻게 풀어나갈지가 관건입니다. 공간 기획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상세 설계도가 툭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브랜드 경험을 기획한다고 해서 브랜딩의 속성과 요소들이 모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떻게든 밑그림이 필요하고 첫 단추가 필요한 것이죠.

제겐 글쓰기가 그런 역할을 해줍니다. 머릿속에 떠다니던 원형의 심상들이 디자인으로 옮겨질 수 있게 하는 데도, 실체가 없던 것들이 경험과 기억으로 전달될 수 있게 하는 데도 글의 역할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읽는 것만큼이나 쓰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죠. 사실 이건 비단 제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겁니다. 기획하는 사람들은 글쓰기의 중요성을 항상 깨닫고 공감하니까요.


- 김도영, <글이 안내하는 곳으로>,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p. 309-310


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집을 테마로 한 TV 프로그램도 여럿 생겨나고 있죠. 시청자가 원하는 매물을 대신 구해주는 프로그램도 있고, 출연자가 꿈꿔왔던 집을 찾아 직접 살아볼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했으니까요.

저는 이런 방송들을 볼 때마다 흥미롭게 여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살고 싶어 하는 공간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구나' 하는 것이죠.

방송에 출연한 사람들 중 그냥 막연하게 큰 집, 좋은 집, 멋진 집을 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정확하고 개인적인 니즈들이 있죠. 자녀들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주되 가족 간의 소통은 단절되지 않는 집, 작게라도 텃밭을 가꿀 수 있고 오전보다는 오후에 햇살이 많이 드는 집, 프리랜서인 아내가 일할 수 있도록 작업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집,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아빠를 위해 마당 한편을 캠핑장처럼 사용할 수 있는 집, 이처럼 모두가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한 그림을 가지고 있음에 매번 놀랍니다.

저는 글을 쓸 때도 이렇게 상세한 니즈를 가지고 써보는 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저 느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가 아닌 내가 독자라고 가정했을 때 어떤 글을 읽고 싶은지를 세심하게 고민해보는 거죠. 니즈라는 것도 설계도와 같아서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이를 충족시킬 확률이 크거든요.


- 김도영, <살고 싶은 집, 쓰고 싶은 글>,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p. 316-317


제일 친한 친구들과 함께 스위스 인터라켄을 여행할 때입니다. 알고보니 스위스는 오후 4시가 되면 마트가 영업을 종료하더군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우선 급한 마음에 근처에 있는 아저씨를 붙잡고 마트까지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오! 서둘러야겠네요.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큰 도로가 나와요. 거기서 왼쪽으로 꺾은 다음 곧장 가면 마트가 보일 거예요. 근데 이걸 어쩌죠. 그 중간에 기가 막힌 맥줏집이 하나 있거든요. 시간이 없으니 16온스짜리 맥주 딱 한 잔씩만 하고들 가요. 빠르게 움직이면 가능할 거예요!"

살아오면서 셀 수 없이 많은 길을 물었을 텐데 기억에 남는 대답은 딱 이것 하나뿐입니다. 저희를 목적지까지 안내하면서도 특유의 위트와 재치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물해줬거든요. 덕분에 그의 동선은 아직까지 저희 사이에서 회자되곤 합니다.


- 김도영, <당신의 지도는 어떤 모양인가요? - BOOKMARK>,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p. 322-323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늘 확신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이어지지 않는 책은 없다'는 겁니다.
작가든 내용이든 분위기든 시대상이든,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 그 책과 연결되는 또 다른 책을 만날 수 있거든요. 책에 빠진 사람은 그렇게 점점 책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이어짐'이라는 것은 비단 책과 책, 작가와 독자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자와 독자 사이에도 아주 끈끈한 연결고리가 생길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 고리는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는 단단하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과는 유연하게 묶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그게 '공존'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 김도영, <에필로그 - 공존 독서>, ≪기획자의 독서≫, 위즈덤하우스, 2021, p.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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