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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Apr 10. 2023

침묵하는 법, 목소리를 내는 법

이 책은 목소리의 힘, 그리고 자연 세계의 비의(秘義, 비밀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는 논픽션 회고록이에요. 어머니와 가족, 자연, 여성과 환경 운동, 그리고 창작과 예술에 대한 경험을 다루고 있어요.


이 책은 저자가 어머니의 빈 일기장을 발견하면서 시작돼요. 암 투병 중 돌아가신 어머니는 유언으로 매년 간직해 온 일기를 저자에게 주겠다고 말해요.


“네게 내 일기장을 모두 남길게. 하지만 약속해야 해. 내가 가기 전까지는 일기장을 보지 않겠다고.”


저자는 그 약속을 지켰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의 일기를 읽을 시간이 왔을 때,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돼요. 수십 권의 일기장이 모조리 비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결국 이 책은 저자의 어머니가 왜 수십 권의 빈 일기를 간직했고 죽기 직전 저자에게 남겼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이며 저자인 윌리엄스가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발견하는 여정이기도 해요.


어머니의 ‘빈 일기’는 어머니의 ‘침묵’을 의미해요. 저자의 어머니가 살던 당시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억압받았다는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또한 빈 페이지는 저자가 "우리가 아직 말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말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빈 페이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는 데 사용돼요. ‘가능성의 공간’이라는 뜻이지요. 저자는 침묵으로 채워진 어머니의 일기장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힘으로써 빈 지면을 또 다른 가능성의 공간으로 탈바꿈해 내거든요. 이렇듯 어머니가 죽음의 순간에 저자에게 물려준 ‘빈 일기’는 풍부한 은유와 흥미로운 역설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요. 더불어 침묵에 이야기를 부여할 때 혼자만의 일기는 모두의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지요.


저자는 “르완다에서는 한 사람의 침묵이 사자의 으르렁거림으로 들릴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또 어머니의 빈 일기장 페이지를 바라보며 저자는 이렇게 말해요.


“어머니는 살아 있을 때도, 죽어 있을 때도, 자신의 목소리를 억누름으로써 내게 목소리를 주었다. 어머니는 대체로 조용하고 우아한 제스처를 통해 말했다. 편지 한 통. 밥 한 끼. 함께하는 산책.”


저자는 어머니의 침묵은 어머니가 그녀만의 방법으로 말하는 것이며 어머니는 당신 자신의 침묵을 잘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해요. 침묵이 어떤 경우에는 그 자체로도 중요한 표현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지요. 이처럼 이 책은 여성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경험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어떻게 침묵과 고요함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요.


《빈 일기》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 지음 l 성원 옮김 l 출판사 낮은산 l 가격 1만5000원


한편 이 책에서는 ‘침묵’만큼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해요. 저자는 이를 할머니인 ‘미미’와의 추억을 통해 들려주는데요. 어머니가 침묵의 힘을 보여주었다면 할머니는 직접적으로, 정직하게 말하는 목소리를 주신 분이에요. 저자가 어릴 때부터 새를 좋아하여 여덟 살 때 탐조인으로서 동네 지부에 새 발견을 알리자 회장은 저자의 나이 때문에 “신뢰할 만한 목격”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때 할머니는 저자에게 “넌 네가 뭘 봤는지 알잖아. 그 새는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어. 물론 너도 마찬가지고.”라고 말했다고 해요. 이런 할머니 덕분에 윌리엄스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느끼면서 새를 관찰하고 평생 생태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었어요.


시적이고 아름다운 저자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책이에요. 환경과 여성의 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세요.



김미향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2023년 4월 10일(월) <조선일보> '재밌다, 이 책!' 코너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23/04/10/20230410000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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