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의 영화는 매번 놀랍다. 이제 이런 말은 클리셰로 느껴질 만큼(이 글은 “놀빠”가 쓰고 있으므로 그 점을 감안해 읽어주길 바란다). <인셉션>으로 표상되는 그의 놀랍고 위대한 상상력은 아마 대부분의 관객이 익히 알고 있을 터. <인터스텔라>를 보고난 뒤 내 감상평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경이롭다”이다.
용산 CGV에서 4DX로 관람했는데, 4DX효과는 극히 미미했다. 쿠퍼(매튜 맥커너헤이)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 때마다 의자에 진동을 준다던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유영할 때 의자가 앞뒤로 움직이는 정도의 미미한 모션뿐이다. 그럼에도 초반 30분 정도의 지루한 도입을 뛰어넘는 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인트로는 지루했다. 쿠퍼와 어린 머피(아역-맥킨지 포이)의 끈끈함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었겠지만, 상대적으로 큰아들인 톰(아역 이름은 모르겠다. 성인역은 케이시 애플렉. 그가 물리학을 전공했다는 게 좀 재미있다)은 쿠퍼와의 유대감이 별로 보이지 않아 시종일관 가여웠다(심지어 쿠퍼에게 영상메시지를 보낸 횟수는 머피보다 톰이 월등한데 말이다. 물론 영화에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감독은 장치적으로 무언가를 버려야 함을 알고 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톰은 버려졌다). 하지만 이런 가족사를 배제한다면 놀란의 상상력은 도입부에서도 빛을 발한다. 인류는 대기근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고, 이 세계는 엔지니어보다 농부가 대접 받는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학교에서 달 착륙은 사실이 아니며 조작된 거라고 가르칠 정도다. 누군가 이 땅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른 곳을 바라볼까 두려워서다.
그리고 그런 이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쿠퍼는 인류를 위한 희생심과 숨겨왔던 자신의 꿈을 그러모아 우주로 떠난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스토리적으로도 재미있어지기 시작한다. 그럴 법한 이야기에 얹어진 우주에 대한 그 해박한 지식과 블랙홀, 웜홀, 성간 사이를 넘나드는 비주얼은 압도적이다. 영화가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쓰인 블랙홀도 감탄을 자아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는 블랙홀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놀란은 그것을 완벽하게 허물어뜨리며 블랙홀에 대한 또 다른 견해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우주 유영 시 흘러나오는 한스 짐머의 OST는 영화 전반에 오묘한 흐름을 선사한다. 신시사이저와 오케스트라가 뒤섞인 선율은 우주의 고요함과 물 흐르듯 잘 어우러진다. 클래식음악과 전자악기의 혼용으로 빚어내는 예술적인 음색, 짐머만의 정체성이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또 하나의 타임슬립영화로도 볼 수 있다. 알고 봤더니 인류를 도와주려는 ‘그들’은 미래의 인류였고 인류는 늘 그래왔듯 답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그 열쇠는 쿠퍼와 머피가 쥐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퍼즐조각이 마치 자석에 이끌린 듯 짜맞춰지는 결말 부분에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놀란은 풀기 힘든 퍼즐을 주고 그 퍼즐을 보기 좋게 맞추는 데에 선수이니까. 지구와 우주, 그 시공간의 간극이 주는 극명한 대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대체 무엇이고 우리는 대체 누구인지가 담겨 있다. 세상은 불안하지만 그 불안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사랑의 힘이라는 뻔하고 흔한 이야기를 이토록 짜임새 있게 다룰 수 있는 감독은 그리 흔치 않다.
다만 도입의 지루한 전개와 더불어 아쉬웠던 점 하나는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아멜리아의 캐릭터다. 매튜 매튜 홈 매튜의 집요하고 끈질기며 인내심 넘치는 쿠퍼와 달리 아멜리아는 떽떽거리거나 징징거리거나 질질 짜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이거나 의도는 그게 아니었더라도 결국 동료를 죽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다. 굉장히 시적이면서도 여전사의 이미지가 강했던 <그래비티>의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같은 캐릭터는 재난영화에서만 가능한 걸까. 어쨌든 <인터스텔라>도 재난이라면 재난인 상황인데! 아멜리아는 아버지에게 속고 만 박사에게 배신당하고 연료가 고갈되는 우주선에 타고 있지만 쿠퍼의 도움 없이는 플랜 B를 실행할 수 없는 캐릭터다.
그럼에도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낯뜨거운 지적 허영심을 내보이는 “놀까”들을 보면 좀 막막해진다. 모두가 하나쯤 가지고 있는 유행 아이템, 너도나도 사제끼는 베스트셀러는 나도 좋아하지 않지만, 취향의 차이가 아닌 비판을 위한 비판은 단호히 사절이다. 아직 놀란이 40대라 앞으로 그의 영화를 감상할 40년이 기대돼 행복한, 나는 “놀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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