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 한구석, 창가에서 아늑한 빛이 쏟아지고 스탠드 하나가 켜져 있는 식탁에 그가 앉아 있다. 나는 놀라 그에게로 걸어간다.
"언제 왔어?"
"방금."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던 그가 자료를 정리하며 웃는다. 부드러운 갈색의 테이블 위에 까만 노트북, 까만 마우스가 올려져 있다. 그 역시 까만 옷을 입고 있다.
"나 천안 가서 살기로 했어."
그가 예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천안? 천안은 왜?"
"결혼할 거야."
"어머. 누구랑?"
"…"
그가 황당하다는 듯 침묵하더니 이내 푸하하 웃으며 대답한다.
"당연히 너지!"
이젠 내가 당황할 차례다.
"…?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연예 활동은 어쩌고?"
"지금 프로포즈하는 거잖아."
얼마전 현실의 내가 광고를 통해 보았던 그가 나의 꿈속에서 달콤하게 웃는다. 그러나 나의 마음 속은 복잡하다. 난 남편도 있고 남자친구도 있는데… 어서 동생에게 이 모든 걸 말하고 싶다.
"승낙 안 해줄 거야?"
그의 재촉에 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짓다 이내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아, 거실 정리! 지금 안 하면 안 돼!"
거실로 나가 고양이들을 껴안는다. 세 마리의 고양이들은 발치에 휘감겨 있다. 안락 의자에 앉아 발목 근처에서 노는 고양이들의 복실복실한 털을 쳐다본다. 그 사이에 침팬지 가족이 등장했다. 네 마리의 침팬지가 노란색 칫솔을 들고 풍성한 거품을 내며 양치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개운해 보여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새 아까의 그가 다가와 내 어깨를 감싸안는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아늑하고 안온한 가정의 풍경.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엄청나게 넓은 공용 화장실에 들어가니 지옥이 따로 없다. 누군가의 토사물들로 가득해 구역질이 난다. 혹시 내가 그런 건 아닌가 되짚어본다. 정신이 없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코를 막고 화장실에서 튀어나와 그에게로 간다.
"화장실에 저게 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가 설명하려는 찰나 쿵 하고 지반이 흔들리더니 나는 어떤 학교 건물에 있다. 벌써 꿈속에서 두 번째 마주하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선 시공간이 묘하게 뒤틀려 있고 뒤틀린 시공간마다 틈이 존재하는데 그 틈을 찾아야만 현실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 지하에 있던 나는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 본다. 적갈색의 벽 앞으로 피아노 연주회가 펼쳐지는 홀이 있다. 여긴 아니다. 여긴 현실이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 보지만 나선형의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을 뿐.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나선형의 계단은 이내 맞물리고 합쳐져 흔적도 없이 녹아버릴 것이다. 그러면 영영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달린다. 복도에 세 대의 엘리베이터가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작동할 것인가. 두 대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려봤지만 허사였다.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길은 오작동이길 바라지만 두 대의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세 번째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퍼렇고 뻘건 빛이 반짝인다. 빛의 속도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어두운 그 안으로 나는 들어간다. 뒤이어 나를 따라 한 무리의 겁에 질린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들도 모두 시공간이 뒤틀린 이 학교 건물에 갇힌 것이다. 다시 한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반이 흔들린다. 사람들이 모두 악 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튕겨지듯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또 다시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간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주머니 두 명이 내 곁에 있다.
"이런 건 드라마에서나 있는 풍경인 줄 알았어요."
이마에 땀이 맺힌 채 풀린 다리로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가던 내가 말하자 곁에 있던 붉은 머리의 아주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내가 그 드라마에서 왔어요."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끝이 없던 계단의 끝이 보인다. 드디어 지상에 안착했다. 뛸 듯이 기쁜 나는 뒤를 돌아보며 아주머니에게 땅에 발을 디뎌 보라 한다.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희미하게 손을 흔든다.
"나는 갈 수 없어요. 내 자리는 여기라서. 잘 가요. 잘 가요."
나는 입술을 깨물고 달린다. 곧이어 시장이 나왔고 대학원에서 만난 동생이 귀걸이를 샀다고 자랑한다.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잘 샀다고 말해준다. 그녀와 함께 걷는데 또 다시 나선형의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을 오를 것이냐, 말 것이냐. 나는 뒤를 돌아본다. 닭꼬치를 파는 노점에서 만들어내는 연기가 시장에 가득하다. 노점들의 붉은 지붕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계단 위쪽에서 올블랙 차림의 그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나는 아는 동생의 손을 잡고 결심한 듯 한 발을 계단 위에 올린다.
시간이 뱅글뱅글 돌더니 나는 대학교 교무실에 있다. 현실에선 별로 친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친구가 교복을 입고 교무실 중앙 테이블 근처에 앉아 있다. 나는 친구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 잘 지냈어? 넌 결혼할 거야."
친구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친구에게 미소를 지으며 행정처로 간다. 흰 와이셔츠에 멜빵을 메고 옅은 브라운색 바지를 입은 교수가 행정처 직원이 되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에이전트 카터를 닮은 직원에게 다가가 서류를 요청한다. 직원은 매우 바쁘고 그 서류가 있어야만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나도 마음이 바쁘다.
"빨리 가서 집을 치워야 해요. 고양이들과 침팬지들이 저를 기다려요. 빨리 이 서류에 사인해주세요."
나는 서류 뭉치를 들고 핏대를 세운다.
이곳은, 먼지마저 갈색인 곳이다.
막막한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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