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해의 폴짝

by 김뭉치

초고를 빨리 쓰고 그걸 계속 고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 초고를 쓰기 시작하기까지가 너무 오래 걸려요. 작가들 중에는 초고를 빠른 속도로 써놓고 공들여 줄여나가는 식으로 쓰시는 분들도 많다고 들었어요. 이야기가 쏟아져나오는 것을 일단 놓치지 않고 다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겠죠. 저는 아무래도 평론가니까 그런 방식은 아니에요. 어떤 내용을 쓸 것인지 설계하는 단계가 오래 걸리고 더 어렵습니다. 논리적 구조물을 만들어내야 하니까요.

- 신형철 인터뷰 「'나의 글'이 돼야 한다는 기준을 자신에게 부과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20


추천사처럼 짧은 글을 쓸 때도 그런 의미에서 '나의 글'이 돼야 한다는 기준을 저 자신에게 부과하려고 해요. 누구나 쓸 수 있는 문장들로 채워지는 추천사라면 굳이 제 이름을 달고 나갈 필요가 없죠. 그러다 보니 추천사 몇 줄 쓰는데도 몇 달을 끌 때가 있어요.

- 신형철 인터뷰 「'나의 글'이 돼야 한다는 기준을 자신에게 부과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21


에세이스트에게 텍스트는 결국 자기 자신이죠. 다른 텍스트를 선택할 때에도 '나'라는 텍스트의 변주로서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신형철 인터뷰 「'나의 글'이 돼야 한다는 기준을 자신에게 부과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27


저 역시 저를 둘러싼 타인들과 어울려 살아갑니다. 때때로 어떤 타인들은 저를 찢고 들어와 저의 타고난 기질을 왜곡하거나 파괴하기도 합니다. 첫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쓰던 시기에 그런 일이 제게 빈번하게, 그리고 꽤 치명적으로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에 직장 생활을 했었기에 거의 늘 외부 세계에 노출되어 있었고, 다양한 타인들 속에 무방비로 놓이는 일이 잦았습니다.

- 김숨 인터뷰 「내가 쓴 소설들이 나를 전환시켰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55


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니까 춤보다 꾸준히 한 게 글을 쓴 거네요. 그건 스무 살 때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니까. 정말이지 글 쓰는 건 꾸준히 했어요. 소설은 열심히 안 썼지만, 그 당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는데, 거기에 거의 매일 글을 올렸던 것 같아요. 일종의 단상 같은 거? 일기 같은 거?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걸 왜 그렇게 열심히 썼지 싶기도 하지만 그 당시의 글들이 제가 나중에 소설을 쓰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글을 쓰는 일이 제게는 가장 적합한 활동이었던 것 같아요. 어디를 갈 필요도 없고,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되니까. 마치 망상을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계속 소설을 썼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 손보미 인터뷰 「사람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10


'거꾸로 된 스트립쇼'는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새물결)에서 소설을 쓰는 방법 중의 하나로 제시된 것이에요. 소설을 쓰게 하는 씨앗은 언제나 작가 내부에서 발현되어야 하는데, 벌거벗은 몸에 계속 새로운 옷을 덧입히듯이, 작가의 내면에서 발현된 씨앗에 계속해서 이야기에 이야기를 덧입히면서 한 편의 소설을 구상해야 한다는 의미죠. 아마도 이건 저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님들도 동의하실 것 같아요. 이야기에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 그래서 이야기 스스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만드는 거요.

- 손보미 인터뷰 「사람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13


마이클(미드 <오피스>의 주인공)은 정말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고 싶어하거든요. 어쨌든 그 문장, 좋은 망원경을 가진 우주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게 어쩌면 소설을 쓰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외계인은 바라볼 수만 있거든요. 그 사람의 얼굴이나 표정을 볼 수만 있어요. 그가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요. 알고 싶어서 바라보면서 노력을 할 뿐이죠. 아까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그런 식의 노력이 재밌는 거라고, 그런 식의 노력이 누군가의 삶 속에서 의미를 건져 올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죠.

- 손보미 인터뷰 「사람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14


어떤 글을 쓰든지 저는 어깨에 힘을 빼려고 하거든요. 개인적으로 어깨에 힘이 가장 잘 빠지는 게 바로 짧은 소설이에요. 단순히 짧아서는 아닌 것 같고요. 뭐랄까, 저를 가장 자유롭게 해줘요. 뭐든 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다른 어떤 소설을 쓸 때보다 자신감에 꽉 차 있죠. 소재적 실험을 해볼 수도 있고, 문장의 단위에서 어떤 실험을 해볼 수도 있고.

- 손보미 인터뷰 「사람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15


정은숙 한국어 시장 규모로는 양장본, 페이퍼백 버전을 따로 낼 수가 없어요. 정말 손익분기점을 넘기 어려우니까요. 서점에서도 아무래도 낮은 정가의 페이퍼백 수익률이 크지 않으니 고가의 양장본 판매가 낫겠고요. 페이퍼백을 좋아해주시는 독자들도 많지만 막상 시장에서 팔리는 비율은 거의 비슷해요. 압도적으로 페이퍼백을 선호하는 경향은 없는 듯합니다.

- 손보미 인터뷰 「사람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p. 116-117


저는 비행기를 서른 넘어 처음 타봤어요! 왜 집을 떠나서 여행을 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울에도 갈 곳이 많은데 왜 굳이? 그런 생각을 했죠. 집에 있을 때는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침대 위에만 있어요. 집에서 소설 작업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웃음) 침대에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 무조건 밖에 나가야 해요. 저는 좀 늦잠을 자는 스타일인데, 여하튼 침대 위에서 눈을 뜨고 세수를 하러 가기까지가 정말 힘들어요. 까딱하면 누운 채로 한 시간은 후딱이거든요. (중략)

여하튼 침대 위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걸 좋아하는데, 사실 그럴 수 있는 날이 주말을 빼면 많지 않잖아요. (중략) 그러다 보니 집에 머무는 것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 손보미 인터뷰 「사람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p. 120-121


한 가지 주제에 끈질기고 깊이 있게 파고드는 그런 책이요. 프리다이빙이라든지, 불면증이라든지, 비라든지, 그런 한 가지 대상에 집착하는 글을 좋아해요.

- 손보미 인터뷰 「사람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22


만약 과거 경험에 대해 글을 쓴다면, 그건 과거의 기억들을 재구성하는 것에 가까워요. 일기를 쓰듯이 무언가를 고백하는 행위는 아닌 것 같고, 과거 속 저의 어떤 행위들이 왜 그런 식으로 일어나야만 했는지를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화자가 해석하는 것에 가깝다고 말하면 될까요?

- 손보미 인터뷰 「사람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24


정은숙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상처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시선이 있습니다. 어디에선가 말씀하신 대로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과 그것에 잠식당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 김금희 인터뷰 「일상적인 풍경에서 미감과 행복을 느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37


작가한테 공간은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간이 미치는 영향은, 그 공간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까지 규정짓는 것 같고요.

- 조경란 인터뷰 「매일 네 시간을 반복하는 게 중요하죠」,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60


쓰는 이야기가 나와서요. 젊은 시절에는 가족의 어려움을 포함한 제 문제들이 너무 커서 다른 사회적인 면으로 눈을 돌리기 어려웠어요.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요. (중략) 이전에는 가족들이 저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어요. 이기적이었고, 이거는 작품이다, 나를 관통해서 나오는 또 다른 하나의 픽션이야, 라고만 생각했죠. 어느 시점인가 내 작품을 위해서 가까운 사람들한테 어떤 아픔이 되는 순간을 만들면 안 되겠다, 아무리 소설을 위해서라도 이것은 쓰면 안 돼,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도 말입니다.

- 조경란 인터뷰 「매일 네 시간을 반복하는 게 중요하죠」,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63


그렇다면 산문은 뭔가, 왜 산문 쓰기는 이렇게 주저하게 되는가 싶은데 산문이 진짜 헐벗은 고백이기 때문이에요. 그런 고백을 할 요량이 아니면 시작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독자로서도 산문집을 읽다가 글쓴이가 고백을 하려다 말았네, 감추면서 쓰네, 이런 게 느껴지면 그 책은 진실되지 못하게 남거든요.

그러니까 산문이 더 어려운 것은 뭘 형상화한다, 재구성한다, 구현한다, 이게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고백을 해야 되는데 이 고백이 왜 필요한가, 내 고백이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또 해야 하죠. 우리는 어딘가 상처와 아픔이 있는 나약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런 고백의 공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조경란 인터뷰 「매일 네 시간을 반복하는 게 중요하죠」,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74


소설은 질문을 던지고 산문은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발견하게 하는 장르가 아닐까요. 내 시각으로 발견한 것들을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질문, 산문은 발견이다. 이것을 잊지 않으면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겠다 하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 조경란 인터뷰 「매일 네 시간을 반복하는 게 중요하죠」,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75


제가 등단 때부터 써왔던 주제인 가족 문제가 국경 밖에서도 독자들이 가장 흥미를 느끼는 주제 같았어요. 가족 문제는 항구불변의 주제라는 생각과 동시에 가족의 이야기만 나오면 모든 독자가 다 같이 한 공간 한 순간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그런 느낌이 신기했어요. 인생사의 영원한 문제죠.

- 조경란 인터뷰 「매일 네 시간을 반복하는 게 중요하죠」,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p. 175-176


저는 제가 소설에 관해서 어떤 재능이 없이, 많은 점이 부족한 채로 작가가 되었다는 점을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웃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다 주의 깊게 보려고 합니다. 더 읽고 생각하고 발견하면서 어쩌면 이전보다 부지런히 써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 조경란 인터뷰 「매일 네 시간을 반복하는 게 중요하죠」,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79


삶도 그렇지만 소설의 시작도 고통의 공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 하성란 인터뷰 「요즘 '한 사람'을 깊이 생각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194


저('제'의 오타인 듯) 머릿속에는 "소설은 풍속의 변천이 가져온 참담한 파탄을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발자크의 말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MR'이 있습니다. 홍대 곳곳에서 'MR'이라고 쓰인 혀 그림을 본 적 있으실 거예요. 그 그라피티는 양화대교 교각에도 있고 제가 살고 있는 대흥동에도 있습니다.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데요. 선 처리가 잘된 단순한 혀 모양을 보는 동안 누구나 작가가 이 세상을 향해 "메롱!" 하고 혀를 빼문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차를 타고 순식간에 지나치게 되는데 너무도 통쾌합니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가벼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건 문학이 아니야'라는 말을 했어요.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지요.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을 다양한 그릇이 필요하지요. 장르를 파괴하고 그 경계를 넘나들고 자유자재로 글을 쓰는 젊은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면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스스로 문학적이고 뭔가 문제작을 만들어내라는 주문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아요.(웃음) 조금 가벼워지면 어떤 글이든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리소설이나 SF소설, 써보지 않았지만 도전할 수 있지요. 물론 웹소설에도 거부감은 없습니다. 더 많은 길이 열려 있다는 느낌입니다.

- 하성란 인터뷰 「요즘 '한 사람'을 깊이 생각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201


그렇기는 한데, 지금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도 해요. 독자들은 10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를 혼동할 수 있거든요. 달리기야 지금도 좋아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좋아합니다. 덜 빠져 있어요. 하물며 세상에 대한 생각들은 이것저것 달라진 게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모든 글을 현재의 시점에서 읽습니다. 그럴 때 생기는 불일치를 제가 감당해야만 하는데, 그게 감당이 되나요? 그래서 쓸 때는 산문이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산문이 더 제한적이고 소설이 훨씬 자유롭다는 걸 알게 됩니다. 소설은 잘못 읽혀도 상처가 덜 해요. 내 손을 떠나 저 혼자 훨훨 날아다니니까. 아마도 제가 죽고 난 뒤에도 그 책들은 혼자서 잘 살아가겠죠. 하지만 산문은 잘못 읽히면 마음이 아픕니다. 형보다 못난 동생 같달까. 물론 그래서 매력이 있는 것이겠지만요.(웃음)

- 김연수 인터뷰 「뭔가를 선택할 땐 첫 마음을 떠올려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264


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존경합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으로서 굉장히 멋있다든지 용기가 있다든지 그런 거에 반하죠. 남성이든 여성이든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끌리는데, 그게 소설에 반영이 되죠.

- 김연수 인터뷰 「뭔가를 선택할 땐 첫 마음을 떠올려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270


굳이 말하자면 나는 좀 성실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건 타고난 재능이 대단치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지요. 역할을 감당해내려는 안간힘 같은 걸 덕목이라고 할 수 없어요.

- 이승우 인터뷰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와 격려와 행운을」,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303


에세이에 대해 '문학적인 것'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문학의 범위를 조금 좁히거나 높이고, 문학의 외곽에 있는 이른바 에세이, 우리나라에서 산문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글들과 구분한 것 같은데, 저는 생각이 달라요. 산문을 소설과 구분해서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요. 우리가 에세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문학에 좋은 에세이가 없어서일 수도 있겠으나 에세이에 대한 인정이 박해서, 말하자면 에세이를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의식 때문에 우리 문학에서 에세이가 약해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유럽에서 에세이가 당당히 문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대조적이지요. 소설과 에세이가 자연스럽게 결합하여 사유의 깊이를 더 잘 보여주는 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요. 카뮈, 보르헤스, 도스토옙스키, 루소, 릴케, 쿤데라……. 소설의 외양을 한 에세이라고 불러야 할 작품들이 많아요. 아까 페미나상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문학상에 에세이 부문이 있더라고요. 저는 좋은 에세이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더 많이 독자들과 만났으면 좋겠어요. 나도 좋은 에세이를 쓰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 이승우 인터뷰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와 격려와 행운을」,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p. 314-315


책을 자기 자식에 비유하기도 하던데, 그 비유를 따라 말한다면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 사랑을 남들 앞에서 표 나게 드러내는 부모도 있고 반대로 그런 걸 쑥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 자식을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럴 때도 있을 테고요.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자식인데도 사랑한다는 티를 지나치게 내는 사람도 있어요. 여러 경우가 있을 테지요. 굳이 말하자면 저는 그런 표현을 쑥스러워하는 쪽인 것 같아요. 실제로 그렇게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도 하고요. 사랑이 없는 것과는 달라요. 자존감 부족이라고 해석하지도 말아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성격일 거예요. 사회나 사람, 일, 관계, 성취 같은 것에 욕심이 아주 큰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아니면 좀 게을러서 그렇거나.

- 이승우 인터뷰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와 격려와 행운을」,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317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마음산책, 2020


윤리에 대해서 좀 고민하게 되는 거 같아요. 이걸 좀 복잡하게 말하면 작가와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 사이의 윤리 같은 건데,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자기가 창조해낸 인물의 소유권을 요구할 순 없는 법이거든요. 사실 그 인물이 온전하게 작가 자신만의 머리에서 나온 것도 아니잖아요? 거기에는 작가가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가족들, 다른 이야기 속 인물들의 그림자가 다 포함되어 있는 거죠. 한데 소설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그걸 잊어버리고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의 조각으로 여길 때가 많은 거 같아요. 작가의 페르소나, 뭐 이런 차원으로 격하시키죠. 그리고 그때마다 인물들은 현실의 우리와는 다른, 질문 그 자체로만 남는 사람이 되는 거 같아요. 사람이 사람이지 질문은 아니잖아요?(웃음)

- 이기호 인터뷰 「손목 힘보다 허리나 허벅지 힘이 더 중요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336


문예창작학과라는 곳에 대한 세간의 오해는 뭔가 창작의 세밀한 기술 같은 걸 가르쳐주는 학과라는 거잖아요? 근데 기술이라는 게 어디 있어요? 소설의 기술이라는 건 다 거짓말이거든요. 그냥 노동만 있을 뿐이죠. 사실 문예창작학과라는 곳은 노동을 가르치는 곳이에요. 산문을 쓰는 것은 노동을 하는 것이고, 노동에서부터 자기 글이 나온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어주는 곳이에요. 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한 문장 한 문장 쓰고 고치는 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어주는 곳이죠.

- 이기호 인터뷰 「손목 힘보다 허리나 허벅지 힘이 더 중요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341


어떤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사실은 시간은 거기 그대로 있는데 우리만 지나가고 있는 거겠죠. 앞으로 또 많이 싸우기도 하겠고, 어려운 일도 다가오겠지만, 지금 이 시간들은 여기 그대로 있겠죠. 그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 이기호 인터뷰 「손목 힘보다 허리나 허벅지 힘이 더 중요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p. 344-345


또 책을 읽는다는 건 물리적으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니까, 어쩌면 이게 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죠. 한데 좀 허무한 건 있죠. 재밌는 것만 하고, 웃기만 하면 좀 멍한 상태가 되지 않나요? 그게 우리가 어떤 수동적인 상태에만 놓이게 될 때 찾아오는 감정일 텐데, 저는 그런 감정의 균형을 맞춰주는 게 책 같아요.

- 이기호 인터뷰 「손목 힘보다 허리나 허벅지 힘이 더 중요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346


오랜만에 사용해보니까 타자기가 시라는 장르하고 잘 어울리더라고요. 속도가 아주 빠르지는 않고, 생각할 여유도 있고, 타자기 치는 소리도 시적으로 들리고요. 시 역시 김중혁다운 시를 써보고 싶어서, 전자기기에 대한 시를 쓰고 있어요. 그러면서 놀고 있죠.

- 김중혁 인터뷰 「김중혁의 여러 버전이 모여 살아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356


학생들에게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곤 하는데요, 소설에서 이야기는 인물이 어떤 사건을 특정한 시간 동안 겪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시에서는 그 사연, 곡절曲折이라는 게 어조의 꺾임이에요. 시는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품습니다. 문장마다, 행과 연마다 말이죠. 첫 구절이 던져지고, 그다음 또 그다음 구절에서 꺾이는 것, 예측 가능성을 배반하는 것, 독자가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 거라고 추측하는데,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오는 것. 그게 경탄이거나 경악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시는 소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은 장르이고, 세상과 닮아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권혁웅 인터뷰 「비슷한 세계를 반복하지 말자는 원칙이 있어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379


그건 메모 많이 하는 증거가 아니라 방 정리도 청소도 안 하고 사는 증거야. 10년 전 메모지가 내내 그 자리에 있다 발굴된 것. 메모는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뭐 떠오르는 게 있어야 메모를 하지. 그러니까 사람이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해. 기본적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전부 써버리고 살면 안 된대. 남겨놓고 살아야지 건강한 삶이고, 정돈된 삶이라는 거야. 내가 1년 내내 절대 못 지키는 캐치프레이즈가 '단아하게 살자'였거든. 그러지 못하니까 늘 탈진 상태에 있는 것 같아.

책이야 걸어가면서도 읽어. 그런데 그게 어쩌면 나한테 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러니까 쓸 시간이 없이 읽는 거야. 그런데 독서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강박증이나 도피겠지. 그거랑 비슷한 패턴으로 나한테 나쁜 게 먹는 거거든.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양쪽 양식, 마음의 양식인 독서랑 먹는 거 그거를 내가 아무 제어를 못하고 브레이크 없이 하고 있어서 몸도 이 모양이고, 정신적으로도 그런 상태가 된 거지.

아무튼 삶에서 뭘 하고 싶어도 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 뜻대로'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나한테 달렸다는 뜻으로, 책 읽기도 먹기도 좀 단정하게 하고 살려는 게 내 목표인 거야.

- 황인숙 인터뷰 「삶 자체가 싫어진 적은 없는 것 같아」,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p. 394-395


1년 정도 가장 집중적으로 읽은 건 존 버거인데, 존 버거 책은 뭐든지 좋고……. 최근에 마음산책에서 나온 안드레 애치먼의 『알리바이』를 읽었어. 근래에 프루스트 『쾌락과 나날』(미행)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걸 읽어서 그런지 안드레 애치먼이 굉장히 프루스트적인 데가 있다는, 비슷한 사람이라는 그런 친근감을 느꼈어. 흥미로웠어.

- 황인숙 인터뷰 「삶 자체가 싫어진 적은 없는 것 같아」,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395


정은숙 하루의 행복은 아침의 느릿함에 있다는 서양 격언이 있어요. 아침에 서둘러서 나가면 행복하기 어렵대요. 경제적인 이유에서 모두 서두르는 것이지만 느긋하게 아침을 맞는 생활이란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 김소연 인터뷰 「오로지 홀로인 방식에 대해 쓸 거예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478


무엇을 하며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삶을 가다듬는 기본을 그 책(『소유냐 삶이냐』)을 통해 얻었다고 생각해.

- 김용택 인터뷰 「새들은 정교한데 내 이야기는 겁나게 서툴렀지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490


공부란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늘 돌아오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지요. 공부란 인간이라는 고향으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좀 과장된 이야기이지만 존재의 본질에 가닿고 싶은 그 어떤 생각이 있었을 거야.

- 김용택 인터뷰 「새들은 정교한데 내 이야기는 겁나게 서툴렀지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p. 494-495


책이 많은 방에서 책 보고 산책하고 놀며 사는 삶을 꿈꿨지. 그런데 딱 그렇게 된 거야. 책 많은 방, 그게 내 인생의 유일한 꿈이었어.

어떨 땐 나한테 주어진 복이 불안하기도 해. 복을 너무 많이 받고 사는 거 같으니까. 내가 별 볼일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과분하게 좋아해주니 말이야. 요즘도 뭔 책을 써야 되겠다가 아니고 그냥 여기 살면서 사는 이야기를 써요. 그러면 책이 되지요. 삶이 책이야 나는.

- 김용택 인터뷰 「새들은 정교한데 내 이야기는 겁나게 서툴렀지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496


농촌 공동체가 오래 지속되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이 도둑질과 막말, 거짓말을 안 했기 때문이지요. 도둑질하면 쫓아냈어요. 추방하거나 스스로 나가야 돼. 마을에서 절대 못 살았어요.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 평생 같이 살아야 되기 때문에. 한 번 거짓말하다 들키면 평생 그것이 따라다녔어요. 막말도 안 했어요.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될 말이 있지요.

- 김용택 인터뷰 「새들은 정교한데 내 이야기는 겁나게 서툴렀지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501


글쓰기가 왜 중요한지. 누구나 다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하지요. 글쓰기를 하자고 해요.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생각을 쓰면 글이 된다고 하지요. 글을 쓰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글을 쓰다가 보면 내가 사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내가 하는 일이 잘 보이게 되는 거지요. 내가 하는 일이 자세히 보이면 내가 하는 일을 잘하게 되겠지요. 글쓰기란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자세히 보게 해서 내가 하는 일을 잘 보고 잘하게 도와주는 거지요. 글을 써서 무엇이 되는 게 아니라 글을 쓰다가 보면 무엇을 하게 되더라. 또 사실 무엇이 되어 있기도 하지요. 글이란 그런 것이다,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해요.

- 김용택 인터뷰 「새들은 정교한데 내 이야기는 겁나게 서툴렀지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506


나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요. 지식을 전달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뭘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나의 삶을 정리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철학은 삶에서 나오고 다시 삶을 살리지요. 철학이라는 게 삶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거잖아요. 정리해야 새로워지지요. 새로워야 신비롭고 신비로워야 살밍 감동적이지요. 감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니까 달라지지. 어제와 다른 오늘을 내가 만들게 되는 거지요. 내가 사는 이야기를 통해 각자 자기 삶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거지요.

- 김용택 인터뷰 「새들은 정교한데 내 이야기는 겁나게 서툴렀지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507


간혹 시골 초등학교에서 강연해요. 거기 가서는 또 아이들하고 노는 거야. 밖에 나가 놀다 와서 글 한 줄씩만 써라 그러지요. 앞으로 살날이 많은데 길게 쓰려 하지 말고 뭐든 한 줄씩만 써라. 그러면 절대 한 줄만 안 써요. 아이들이 쓴 글 각자 읽게 하고, 누가 쓴 글이 좋은 글인지 아이들과 같이 좋은 글을 찾아요. 사람 마음은 같아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글을 어린이들이 뽑더라고. 그래야 자기 글을 자세히 보게 되어서 점점 생각을 잘 정리하는 거지요.

- 김용택 인터뷰 「새들은 정교한데 내 이야기는 겁나게 서툴렀지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508


그래서 우리의 일상이 늘 불안하고 초조한 거지요. 누구나 다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거지요. 공부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무엇을 '하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 김용택 인터뷰 「새들은 정교한데 내 이야기는 겁나게 서툴렀지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517


우리가 왜 힘드냐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힘든 만큼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인간적인 존중을 받지 못해서인 거야. 인격적으로 존중을 받으려면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휴식이 주어져야 된단 말이지요. 말하자면 인간다운 삶이 제도적으로 보장이 되어 있는 나라, 나는 그런 나라가 잘사는 나라라고 봐요.

- 김용택 인터뷰 「새들은 정교한데 내 이야기는 겁나게 서툴렀지요?」,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p.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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