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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Nov 19. 2020

덕업일치, 큐큐의 출판 기획 이야기

아마도 책이 좋아 책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비슷하지 않을까. 큐큐를 하기 전까지 나는 디자이너로 출판사에서 13년 가까이 근무했다. 그곳에서 만난 동료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점심시간이나 퇴근길, 회식 등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에서는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인지 관심 있는 책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분명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고 코앞의 업무를 쳐내며 언제 그 많은 책을 읽는지 알 수 없었지만, 동료들은 매일같이 신간을 챙겨 보며 책을 읽는 기쁨과 만드는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어김없이 마음속에 만들고 싶은 책을 품고 있었다. 함께 작업하고 싶은 저자와 작품의 목록이 있었고, 만나고 싶은 독자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알 수는 없었지만, 출판사의 이름을 고민하기도 하고 로고나 책의 판형 같은 구체적인 형태를 그려보며 언젠가 자신에게 기회가 온다면 마음속에 그렸던 책들

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절판되는 책들. 상업적이지 않아서, 그 외 많은 이유로 절판되는 책들에 대해 아쉬움을 나눴다. 주말마다 절판된 책을 찾아 헌책방을 다니기도 했다. 그곳에서 발견한 책들을 보물처럼 여기며 만약 기회가 된다면 복간하고 싶다고, 그러니 언제 절판될지 모르는 책들을 빨리 사둬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책에 대한 동료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대단해 보였다. 출간되지 않는 책들은 그럴 만한 수많은 이유가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박봉의 출판사 직원으로 살아가는 게 고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 많은 책을 만드는 것은 환경을 위한 것도 아니며, 나무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출판이 더는 미래가 아니라고 푸념하면서도 여전히 책을 만들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 틈에서 나도 언젠가 한 권쯤은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막연하고도 나이브한 생각을 하곤 했다.


퀴어문학 출판사 큐큐의 시작은 그렇게 막연하게, 읽고 싶고 궁금했던 책들의 목록을 쌓아가며 시작되었다. 틈틈이 퀴어서적의 출간 소식이나 리뷰를 챙기다 보면 자료들이 쌓였고 덕질은 항상 재미있었다. 시간이 흘러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들을 만나면 즐거웠다. ‘역시 이 책을 출판한 사람도 나처럼 생각했겠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같은 내적 환호를 질렀다. 그럼에도 아무리 기다려도 출간되지 않는 작품들은 여전히 많았고 독자로서의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해외에서 출간되는 청소년 문학에는 퀴어 앤솔러지나 고전 작품을 퀴어서사로 리라이팅한 책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어 한국에서도 비슷한 형식의 책들이 나오길 기대하곤 했다.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사포 외 지음, 황인찬 엮음, 이성옥 외 옮김, 큐큐, 2017


2017년은 페미니즘 이슈가 확장되면서 여성,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문학 전반에 스며들던 시기였다. 퀴어 스크린셀러가 등장했고 퀴어문학이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뻗어 나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루비프루트 정글』이 출간된다면 상업적인 성공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책을 만들며 수익을 보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대박 나면 어쩌지’ ‘빌딩 사면 어쩌지’ 하며 헛된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날카로운 메시지와 유머, 번역도 좋고 디자인도 예쁘고 추천하기에도 좋은데 왜 입소문이 나지 않는 걸까. 한동안 이 실패를 인정할 수 없어 밤잠을 설쳤다. 내용이나 인물의 개성이 보편적인 특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더욱 그랬다. 사실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고 고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읽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의 기준과 가치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루비프루트 정글』 리타 메이 브라운 지음, 알.알 옮김, 큐큐, 2019



- 최성경 큐큐출판사 대표, 「덕업일치, 큐큐의 출판 기획 이야기」,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523호(2020. 11.5 발행) 기획자 노트 릴레이 Ⅱ 4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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