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계약직 백수

by 현상

이 책의 근본이자 지난 한 해 동안의 나를 대변해주는 아주 좋은 단어이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구글에 검색했을 때 내 브런치 주소만 나오는걸 보니 아마도 내가 최초로 사용한 단어일 것이다.


계획이 뒤틀리고 다시 일 년을 준비해야하는 시점에서 나를 정의하는 단어가 필요했다. 아무 의미 없이 보내는 일 년보다는 테마를 정하고 보내는 일 년이 훨씬 의미 있지 않은가?


그래서 곰곰이 생각한 결과가 '계약직 백수'이다.


아마 대다수의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는 경우는 없을 것 이다. 4년을 스트레이트로 다니고 졸업하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생이어야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챙기기 위해 졸업 유보를 하는 경우도 있고, 대외활동이나 인턴 등 경험을 쌓기 위해 휴학을 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졸업을 하더라도 기업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맞추기 위해 다시 학원을 등록해 공부하고, 공시를 준비하기도 한다.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부류도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2020년을 강타한 코로나19로 인해 취업시장 자체가 동결되는 바람에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전염성이 강한 탓에 다수의 인원이 모여야 하는 국가고시나 기타 자격증 시험 역시 시행하지 못하니 취준생들의 고민은 이전 세대의 고민과 다른 개념의 고민이 되었다. 시험을 응시할 기회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인데, 채용도 하지 않으니 취업을 향한 청년들의 의지는 서서히 꺼져갈 뿐이었다. 실제로 20대 ‘취업 포기자’가 급증한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백수가 되었고, 방황하고 있다.


누군가 취업을 하면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고, 할 말이 없어진다. 지인들이 요즘 어떻게 사냐고 물어봐도 할 말이 없다. 백수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깔리는 불편한 적막감, 견디기 어려워 불편한 자리를 서둘러 벗어난다. 그리고 밀려오는 허망함과 상실감.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물음은 나를 더 캄캄한 어둠으로 몰아낸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 근본에 대해 고민하는 건강하고 철학적인 질문과는 거리가 멀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육체의 편안함에서 오는 불안감은 정신으로 이어져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지난 일 년을 계획에 없던 백수로 살아왔다. 알바를 해본 적도 없고 다른 직장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오로지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시야를 가리 도 앞만 보고 달려왔다. 목표를 위한 방향성이 되어야하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방향을 위한 목표가 되어있었다.


내가 가는 길이 옳아. 지금처럼만 잘 하면 될 거야. 이미 목표는 세웠고 문제없이 이루어나가고 있어. 그런데 목표를 세운 이유가 뭐였지?


목표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달성을 위해 세우는 중간과정이다. 저 멀리 내다보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달성하는 과정이고, 이를 보다 효 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설정하는 것이 방향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있던 것은 주객을 전도하여 그저 과거의 성공만 믿고 비뚤어진 방향을 수정하 지 않은 채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참 쉬운 답이었다.


길을 잃었으면 멈추어 서서 내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올바른 길로 경로를 변경하면 된다.


멈추고, 재확인하고, 방향을 트는 과정은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제껏 내가 해온 성과를 멈춰야하며, 심지어는 부인해야한다. 내가 옳지 않았음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는 동안 누군가는 앞 서나간다. 분명 내 뒤에 있었고, 나와 함께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나를 지나쳐 저 멀리 떠나가고 있다.


하지만 감당해야한다.


올바르지 않은 방향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하며, 작은 틀어짐은 인생을 걸고 설정한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 지금은 사소한 문제일지 몰 라도 훗날 치명적인 문제로 나를 덮쳐올 것이 분명하다.


잠깐만 멈춰 서자.
딱 한 발자국만 내딛지 않으면 된다.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만 내딛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뒷걸음질도 쳐야하고 가끔은 옆으로 피해가기도 해야 한다.


당장은 뒤쳐질 수 있지만 나만의 페이스로 나아가자.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존재라도 언젠가는 취업에 성공해 나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갈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


백수로 살면서 받은 죄책감과 상실감, 모욕감은 앞서 나간 자들은 경험하 지 못한, 나를 더 단단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귀한 경험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조금만 힘내자.


지금은 백수이지만 언젠가는 취업에 성공한다. 분명한 사실이다.


먼저 취업한다고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순간의 감정과 경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나의 미래를 향한 발판으로 삼자.


그러니까, 우리는 찬란하게 빛날 그 날을 위해 잠시 백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경험을 가지고 나를 담금질해 더 단단하고 강해질, 나만의 길을 걸어 그 누구와도 비교 불가한 '계약직 백수'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20. 오르막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