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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사 Aug 28. 2015

장 그르니에 - 섬

부정을 통한 실존

까뮈를 사랑한다면 피해갈 수 없는 이름 중 하나, 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장 그르니에다.

그런데 묘하게도 한참을 만나지 못했다. 까뮈를 좋아하다보니 여기저기서 걸리고 스치는데도 참으로 만나지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친구와의 통화에서 그르니에 이야기가 나왔고 며칠 후 들른 서점에서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 책도 사람처럼 인연이란 게 있는지라, 어쩌면 때가 무르익어 그랬는지 모르겠다.

책의 시작은 재미나게도 까뮈의 추천서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김화영 선생님의 감성충만 소녀스러운 추천글은, 조금은 까칠한 그르니에와의 만남에 긴장해있던 마음을 풀어주었다.
책에 실린 산문들의 첫 문장들은 정말 하나 같이 매혹적이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공空의 선택

특히 고양이 물루의 첫 문장은 어찌나 직격하는지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을 정도였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런데 고양이 물루를 정점으로 부활의 섬까지 읽으면서, 굉장히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는데, 그것은 결코 好의 감정이 아닌 분명한 거부감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기술해나가는 시선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그러다 글을 마무리 짓는 결론에서 섬뜩함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르니에의 글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언어화한다면 대충 이러한 것들일게다.

'실험체' '잘 벼린 칼날' '깨진 크리스털' '금속성' '차갑고 미끈한 파충류'

그는 이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바로 그날 저녁부터 떨어진 낙엽이 그 위를 덮었다. 나는 발길을 재촉하여 허둥지둥 내 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음날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이사 준비가 아직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 고양이 물루

나는 지금, 아직은 희미한 의식이 남아 있을 때의 백정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의식을 잃었고 그 다음 일은 그 어느 누구와도 상관없는 일다. - 부활의 섬

그래서 '아,까뮈는 좋지만 무언가 그르니에의 글은 맞지않구나'는 결론에 이르렀고 뒤에 남아있는 <상상의 인도>,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읽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이게 참 인연인지 (글 자체의 가독성은 상당히 좋다) 몇 페이지 안남은 거 다 읽.어.치.우.자.는 마음으로 다시 책을 손에 들었다.

그런데... 이거 참,

마지막 이 두 편을 읽고나니 이 작가의 시선에 대한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 이해가 되면서... 나도 모르게 다시 책 맨 앞을 펼쳤다.


그렇게 까뮈의 서문을 읽으면서 찰나와 같은 한순간, 읽었던 그르니에의 글들이 하나로 꿰어지고, 그래서 그 힘에 끌려 맨 첫 산문인 '공의 매혹'까지 다시 읽게 되었고, 그때 얻은 깨달음은 맨 처음 책을 펼쳐 읽었을 때 받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보통 까뮈의 문학을 논할 때 상당히 자주 듣는 설명이 있다.

'부정을 통한 긍정' '실존주의가 끝나는 곳에 내가 있다.' 등등.


그르니에를 읽고 나니 소위 말하는 까뮈의 '부정'의 기법이 어디에서 어떻게 잉태된 것인지 눈에 들어왔고 '왜 실존주의가 끝나는 곳에 내가 있다'고 까뮈가 말한 것인지, 그리고 두 사람이 공통으로 택한 '부정'의 기법의 본질적인 차이,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한, 완전히 다르면서 동시에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 (등을 맞대고 존재한다고나 할까) 종착점(?) 또한 확연하게 다가왔다.

그르니에의 부정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 카데고리에 속한 나는 부지불식간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그르니에의 '부정'은 일상언어로의 부정이 아닌 자연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위해 인간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부정했다. 그리하여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고 벅차게 만드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들어있는 '생존'을 위한 '살육'을 일깨운 것이다.

예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스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날갯짓으로 강을 향해 뛰어드는 물수리, 그리고 그 물수리가 성공적으로 낚아채 사냥한 숭어, 눈부신 햇빛에 반짝이는 사방으로 튄 물방울과 싱싱한 비늘의 펄떡거림이 그대로 드러나는 숭어의 몸부림, 웅장한 산맥들 사이로 사라지는 물수리, 다시 화면에 남은 곳은 찬란하리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흐르는 강물, 여전히 푸르름을 잃지 않는 녹색의 들판, 만년설을 모자처럼 쓴 커다란 산맥, 모든 '비극' (인간의 시선에서)은 사라지고 평온함만이 남은 '침묵'이었다.

그르니에의 끝은 이렇게 '침묵', 더 나아가 '무無'였고 아이러니하게 '실존'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느낀 것은 확실히 감동이었다. 지금까지 가졌던 내 것과는 확연하게 다르지만, 그르니에가 도달한 그것이 주는 매혹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까뮈의 서문을 읽었을 때, 까뮈의 시선 (그러니까 내 것과 유사한 시선)으로 바라본 그르니에가 고스란히 다가왔고, 까뮈가 느꼈던 감동, 차이를 통한 충격적인 깨달음 (비슷한 데서는 공감을 느끼고 반성을 할지언정 머리를 후려치는 깨달음을 얻기란 어렵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르니에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과연 그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잔혹함을 내가 견딜 수 있을지... 는 차치하고라서도 말이다.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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