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은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무대의 일부이다
"이번엔 모 가수의 30주년 콘서트에 가볼까?"
전날 다녀온 이문세 콘서트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모 가수 콘서트의 예매 버튼을 눌렀다. 두 달 전 일이다.
두 달 남짓 남은 콘서트까지 기분 좋은 기다림이었다.
사실 남편은 이번이 일생 두 번째 콘서트였다. 아내와 딸의 덕질을 위해 콘서트나 팬미팅에 운전기사를 자처하기도 하고, 표도 사주었던 남편도 관심없는 듯 했지만 콘서트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처음 함께 간 이문세 콘서트에서 남편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이십여 년 동안 처음 보는 소년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에 상큼한 이벤트가 더해지자 몰랐던 남편의 모습도 보게 되고, 그동안 나 혼자 누군가의 팬으로 지냈던 시간에 미안함도 느껴졌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진작 같이 다닐걸.'
그리하여 함께 가게 된 우리 부부의 두 번째 콘서트는 '임창정 30주년 콘서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하니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고, 가수의 사진이 크게 인쇄되어 세워진 포토존에는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사실 나는 임창정의 팬은 아니었다. 나는 임창정의 노래를 좋아하고 남편은 임창정의 코미디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으로서의 기대가 조금 있는 정도였다. 가창력과 입담에 대한 기대였다. 그런데 신나는 댄스곡과 함께 등장한 눈이 초롱한 가수의 모습에 바로 그 무대로 빠져들어갔다.
남편과 함께하는 문화생활로 찾은 콘서트는 예상치 못한 감동과 울림을 내게 남겼다.
절절한 발라드가, 신나는 무대가,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팬들의 눈빛이 30년 세월의 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팬은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무대의 일부이다."
누군가의 이 말처럼, 이 콘서트에 온 사람들은 가수 임창정의 무대의 일부가 되었다.
객석 어딘가에서 "멋있어요." 한 마디에, 가수는 그 팬을 무대 쪽으로 부른다.
무대 쪽으로 오라는 소리에 "꺅~" 소리를 지르며 총알같이 뛰어나오는 여성 팬과 딸아이를 목마 태우고 함께 뛰어오는 배우자의 들뜬 모습으로 인해 객석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백발이 멋스러운 할머님도 무대 쪽으로 나오셔서 앨범 선물을 받으시고 가수와 인증샷을 찍으셨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엄밀히 말해 좋아하는 연예인 앞에서는 누구나 소녀나 소년이 되나 보다.
"나(가수)와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우연히 만나 사진 찍은 적이 있는 사람 계세요?"
가수의 질문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손들고 뛰어나가 사진을 인증해 보였다.
가운데 가르마 단발 같은 헤어스타일의 가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내미는 팬은 거의 20년 전 사진을 보여 준 듯하다.
일반적으로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팬은 객석에서 무대를 즐기는 콘서트와 달리 시시때때로 무대 근처로 팬들이 뛰어가 가수와 대화를 나누고 선물도 받고 사진도 찍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낯선 이 광경은 30년의 시간 동안 이 가수와 팬들이 만들어 온 이들만의 문화가 아닐까?
콘서트 이름이 가수의 최근 노래 '촌스러운 발라드' 이름을 딴 '촌스러운 콘서트'였는데, 팬들과 소통이 활발한 콘서트라 더 신박하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이 가수의 콘서트에서 관객 한명이 '소주 한잔' 노래를 정말 뛰어난 가창력으로 불러 조회수가 1300만에 이른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런 순서가 있어 여러 관객에게 차례가 돌아갔다.
약간 아쉬운 노래 실력의 관객은 뜻밖의 웃음을 주었고, 뛰어난 노래 실력의 관객은 가수와 자리를 바꿔 무대에 올라 잠시 관객석에 앉은 가수 앞에서 실력발휘를 했다.
길에서 마주치거나 스쳐 지나가면 모두 타인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콘서트장에서만큼은 한 가수의 노래를 좋아하고 그 삶을 응원하는 동지이다.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런 이벤트는 삶에 활력을 준다. 내 취향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도 하고, 좋은 노래에 울고 웃듯 인생 즐거움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음악은 시대를 넘고, 마음을 잇는다.
30년 세월 동안 활동한 가수의 노래는 관객들 저마다의 추억의 한 페이지다.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여보세요 왜 말 안 하니'
'소주 한잔'이라는 노래는 누군가의 이별노래, 노래방 18번이다.
'이것만 기억해 줘 너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걸/많은 시간 지나 모두 변한대도 지금 이 설렘들을 아름답게 간직하는 거야'
가수가 곧 결혼을 앞둔 두 커플을 무대로 불러 '결혼해 줘'를 불러 주었다. 수많은 관객들의 축하와 부러움을 받는 그 순간을 그들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결혼해 줘' 노래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카메라가 관객석을 잡으며 야구장에서처럼 '뽀뽀타임'이 이어졌다.
다들 행복해 보이는 가운데 입꼬리 올라간 채로 저마다 '뽀뽀타임'에 충실했다. 신박한 콘서트 장면이었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멈추게 한다.
수많은 히트곡을 열창한 후 이어지는 '앙코르' 연호에 다시 등장한 가수는 신나는 댄스와 함께 내리 다섯 곡을 열창했다. 1층 관객들 전부가 일어나 댄스파티에 버금가는 호응으로 막바지 무대를 즐기고, 2층에서는 가수의 무대와 1층 관객석의 신나는 광경을 동시에 볼 수 있어 나는 더 신이 났다.
"이 노래 안 불렀다."
끝인 줄 알았지만, 우다다 무대로 뛰어나와서 마지막 한곡까지 야무지게 열창해 준 임창정 가수
나는 오늘로써 '팬'이 되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인파 속에 섞여 여기저기 들리는 신나는 후기를 들으며 30주년 콘서트의 여운을 길게 느꼈다.
"예술은 우리가 놓치고 있던 감정을 상기시킨다."라는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이번 콘서트는 여러 감정들을 하나씩 일깨웠다.
팬이 아니어도, 오랜 시간 본인만의 음악을 해온 가수의 노력과 그것을 알아주는 팬들의 가수에 대한 의리를 마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남편과의 문화생활로 시작된 하루가 뜻밖의 감동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우리 부부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소중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