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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시옹 Mar 23. 2022

언론의 수준은 사실 우리 생각의 수준

논조가 없기에 같이 낮아진 언론의 수준과 우리가 읽게 되는 글

Anete Lusina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우리나라는 논조가 없는 나라이다. 


물론 다른 중국, 일본 그리고 대만과 같은 나라와 비교하면 논조를 더 선명하게 그리고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긴 하다만, 영미권 국가들, 프랑스, 독일과 같은 나라와 비교해서는 한참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아니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수 있겠다.


언론의 수준이란 단어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 언론을 이루는 구성원이 어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언론을 구성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근데 왜 모든 사람은 언론의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걸까? 분명 우리 사회 구성원들 면면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이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던 중, 하나 실마리가 된 부분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이나 지식은 여타 다른 동아시아권 국가에 비해서는 더 진취적인 편이며, 글로벌한 상식과 지식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근데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견이 없다. 굳이 말로 꺼내지 않더라도, 다들 머릿속에 생각할 만한 의문은 분명히 존재할 텐데, 우리나라 사회는 그러한 고민을 더 깊게 하기보다는 무언가 빠르게 답을 찾아 성급하게 결론을 내는 방식에 더 익숙해져 있다.


이 의견이 없다는 말을 좀 더 자세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좋고 싫음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게 좋고 왜 그게 싫은 지에 대한 의견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강조하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심하게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창의력과 독립적 사고는 사실 내가 무언가를 왜 싫어하고 좋아하는지에 대한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유를 찾고 명확하게 하고, 그 이유를 탐구하기 시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어떠한 제품이 싫다고 생각하면 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제품의 광고모델이 사회적 논란을 겪었음에도 제조회사에서 아무런 조치 없이 광고모델로 기용해서 호감도 하락

노골적인 타사 비난 광고에 질려서 호감도가 하락

제품의 성능을 과대 포장하고 팔았음에도 소비자들에게 어떠한 보상조치도 없이 안하무인 식으로 대응을 이어나가서


이러한 오만 가지 이유들이 튀어나올 텐데,

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꾸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사실 동아시아권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뒤처져 있지 않은 편이지만, 이 글의 독자는 한국인들이기에 이렇게 썼다.)

이 이유를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또 글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너무나도 강력해, 간단히 써도 되는 것들을 쓰는 것조차도 두려워한다.


이유를 정리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쓰는 것이 모든 창의력과 독립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데, 그걸 두려워하니 우리가 찬양하고 그렇게 되길 원하는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발달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시작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그리고 우리의 공교육 시스템과 주입식 교육환경 그리고 억압적 분위기를 탓하며, 시스템적인 요소로 개인의 사고를 발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심한 경우에는 100여 년 전에 끝난 조선시대까지 끌어와 우리의 지연된 사고발달의 핑곗거리를 만든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다른 나라들보다 더 특수하게 억압을 하는 환경에 처한 나라일까?


프랑스는 자유의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경찰의 무력탄압과 시위대에 대한 압박 그리고 엘리트주의 정치인들의 정신 나간 발언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미국인들의 사고에 반하는 그 시대에 필요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예 무시를 당한다. 미국은 자신들의 사고와 반대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 = 그 사람의 의견으로 동일시하며, 그 의견으로 인해 그 사람의 주의 인간관계와 인적교류가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사회적으로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게 완전히 고립을 시키는 구조라는 것이다.


영국은 더 나아가 아예 왕정시대에서부터 이어진 계급이 언어와 생활습관까지 지배하며, 각 계층마다 주장할 수 있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범위가 사회 규범적으로 정해져 있다.


우리가 이런 다른 나라들을 자유롭다고 여기는 이유는 우리는 그 나라에선 외국인 즉 잠깐 있다가 떠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방랑자와 여행객의 영혼이 가장 자유롭다는 것은 모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나라에 쭉 살아야 하는 사람 입장은 다르다. 그들은 그 나라의 시스템 안에서 쭉 살아야 하기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또 그들이 외국인에게 하는 말과 그들끼리 하는 말이 다르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상식적으로 여행객이나 외국인에게 자랑스럽게 자국의 뒷담을 까며 악담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자랑스러운 자국의 역사와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이야기하며 자랑하는 게 더 자연스럽겠는가?



그래서 사회적인 분위기를 탓하며, 우리의 논조 없음에 대한 핑계를 대는 것은 무책임하다고도 생각한다.

다른 나라들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이 있으며,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모두 우리와 비슷한 동일한 고민이 있다. 다만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적어도 논조가 없는 상태로 방기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왜 싫어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명확히 써 내려간 이후에, 그 이유에 대한 해답 혹은 분석을 하는 과정에서 ‘논조’가 탄생한다.


그 논조가 바로 우리가 좋아하는 독립적 사고와 창의력의 원천이다.


우리나라 기사는 정보가 잘못돼서 혹은 사실관계를 왜곡해서 문제가 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단 보통 논조 없이 인공지능보다 못한 수준으로 정보를 나열하기만 해서 문제가 된 경우가 더 많다. 정보는 정보 그 자체로는 큰 가치가 없다. 정보만 나열하고 그 글을 기사라고 도장 찍는다 한들 수많은 해석과 논조가 들어가지 않는 정보는 그저 찌라시에 불과할 뿐이다.


어떤 사실 혹은 정보를 받았으면, 이 시대, 흐름 혹은 자신의 생각이나 논조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공해 독자들에게 전달할 때, 그때 비로소 그 글은 단톡방에 떠도는 찌라시가 아닌 기사가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언론환경은 단톡방에 떠도는 찌라시들을 잘 편집해 포털에 보기 좋게 올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기사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를 검색하면, 그것과 동일한 거의 대동소이한 “생각 없는 쓰레기 글 모음” 수백수천 개가 쏟아진다. 이럴 바에 차라리 기사를 쓸 힘으로 카카오톡 뉴스 단톡방을 운용하는 것이, 속보를 전달하거나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기에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 기사는 생각이 없다. 더 정확히는 논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씩 나오는 기획기사나 칼럼들을 보며, 아 그래도 우리나라에 이런 다양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속적으로 발굴해내는 대단한 기자와 작가들이 남아있구나 안심할 때가 많다.

다만 문제는 독자들이 접하는 대부분의 기사는 딱 카카오톡 뉴스 단톡방 수준이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내 기사 혹은 글을 안 읽지라고 생각하기 전에, 내 기사가 논조를 담고 생각을 담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어떤 정보글을 쓸 때, 단순히 정보를 나열시키는 게 아닌, 그 정보를 논조 혹은 흐름을 바탕으로 재배열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러고 그 정보와 논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결론 혹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거나 적어도 제안하려고 시도한다.


우리나라 독자들도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이 있은 기사들은 분명 시간을 할애하면서 읽는다. 기존의 뉴스 즉 찌라시성 뉴스 글에 독자들을 길들인 건 기레기라고 불리는 기자들과 그걸 부추긴 언론의 잘못이고, 신문부수 감소와 연이은 폐간 그리고 인공지능 시스템으로의 대체로 그 업보를 되돌려 받고 있다.


어느 나라의 언론의 수준은 대체로 그 나라의 논조의 수준과 일치한다. 더 명확하게 파고드는 논조를 가진 나라일수록, 정치 변화가 더 빈번하게 일어나며, 특정 이상한 말을 하는 정치인이 있긴 하지만, 논조가 자유롭기에 그 정치인을 교체하는 것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이 논조가 깊게 발달하지 않아서, 수준 낮은 정치인들의 지배가 더 오래가는 경향이 있고, 바뀌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리는 편이다. 이런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론사에게 기자들에게 더 깊은 수준의 더 깊은 고민을 담은 논조를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각 기관, 단체, 정치인들을 분석한 것이 아닌, 그저 대리 광고해주는 기사를 계속해서 보게 될 것이다. 



논조가 발달해야 우리나라 언론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도 올라갈 수 있다.

모두가 생각하고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해야 우리가 읽는 정보의 질이 달라진다.

남이 정보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내가 써보자 (우리에겐 브런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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