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그리워한 풍경, 묵호 여행기
'오랫동안 무언가를 그리워한 사람은
결국 그 꿈을 닮아간다'
묵호로 향하는 KTX를 예약하며
내 머릿속에 이 문장이 오래 맴돌았다.
몇 주째 무기력한 채로
이력서, 포트폴리오만 들여다보며
살아가던 중이었다.
'하기 싫다' 이상의 감정.
속이 꾹꾹 눌리는 기분.
그럴 땐, 도망치듯 어딘가로 떠나는 게
유일한 숨구멍처럼 느껴졌다.
‘어디로 가지?’ 고민하던 순간,
문득 오래전부터 궁금하고
그리워했던 한 풍경이 떠올랐다.
조용하고 낯선 바다,
낡은 간판,
누군가의 여백 같은 골목길.
그곳의 이름은, 묵호였다.
그렇게 나는
‘나를 데리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다이어트 한답시고 멀리했던
햄버거, 프레즐, 레모네이드까지 챙겨 먹고
기차에 올랐지만,
생각보다 마음은 더 무거웠다.
계속해서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무거운 감정들이
쉴 틈 없이 튀어나왔고,
미래에 대한 걱정, 이별로 인한 번잡한 마음들을
도저히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 밤, 숙소에 도착해서도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도망치듯 왔지만, 진짜 피하고 싶었던 건 뭘까.”
하는 질문들을 반복했다.
새벽 2시.
늦게까지 핸드폰을 들여다 보다가
어느새 눈은 무거워졌고
침대에 누운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밖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 소리인지, 기계음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문득, 내가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완전한 혼자’라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되자 나는 화장도 하고, 머리도 말리고,
어제보다 조금 더 의욕 있는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섰다.
어쩌면, 그게
내가 여행을 떠나야 했던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괜찮아”라는 말,
그걸 믿어보기 위해.
아침은 생선구이가 유명한 식당으로 골랐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
커플과 가족 단위 여행객 사이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며
머쓱한 ‘뻘쭘함’과 마주했다.
사람들 틈에서
내가 아주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지만,
그 작은 존재가 한편으로는
그리 외롭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관광객들 사이에 유명한 카페로 향했다.
흑임자 커피가 유명한 곳.
낯선 조합의 디저트였지만,
라떼의 부드러운 크림과
흑임자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어쩐지 그 아침의 내 기분과도 잘 어울렸다.
달콤 쌉싸름한 느낌.
'아메리카노 먹을까,
아니야. 이렇게라도 일탈을 해봐야지.'
내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건 절제하는게 '당연해진' 일상을
살아가던 나만의 작은 일탈이었다.
지나가던 카페의 유리창에
낯선 내 얼굴이 비쳤다.
‘이 얼굴이 지금 조금은
덜 지쳐 보이는 것 같아.’
그제야,
묵호에서의 짧은 하루가
조금씩 나를 회복시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여행이 끝난 후,
나는 여전히
삶의 커다란 질문들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고,
그 어떤 미래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묵호의 그 조용하고 선선한 공기 속에서
내가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이유 하나는 찾았다.
묵호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곳에서의 하루는 자주 떠오른다.
떠밀리듯 도착했던 바닷가,
잠 못 이루던 새벽의 적막함,
혼자 밥을 먹던 식당에서 느꼈던 어색함,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위해 커피를 고르고, 풍경을 고르고,
기억을 고르던 내 모습.
그건 분명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하루였고,
아주 조용히 나를 일으키고 있는 하루였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지만,
그 하루 덕분에 조금 더 나를 믿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내 안의 낯선 계절은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