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툭한 일상의 발견

본인의 카피 한 줄도 외우지 못하는 처참한 기억력의 카피라이터 이야기.

by 김현임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 했다.

엄연한 창작의 영역이지만 성실해야 열에 하나를 건질 수 있는 것.

오늘은 아주 뛰어난 ‘망각’의 소유자가 카피라이터로서의 길을 걸어가며

본인의 카피 한 줄도 외우지 못한다는 아킬레스건을 이겨내기 위해

모든 감각을 동원해 ‘기록’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웃지 못할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날카로운 아이디어는 뭉툭한 일상에서 나온다.”는 어느 카피라이터의 뭉툭한 일상의 발견.

지금부터 시작하겠다.



김민철.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엄연한 여자. 광고를 너무 몰라서, 기억력이 지독히 나빠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시작한 치열한 필기로 이미 한 권의 책을 낸 바 있다. 심지어 회의시간의 회의록이 책이 될 정도니 얼마나 써댔을까 싶을 정도. 그 책의 제목이 <우리 회의 나할까?>다.


“나에게 인생을 잘 살 수밖에 없는 기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기본기를 키우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다니고, 뭔가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렇게 비옥하게 가꿔진 토양이 있어야 새로운 아이디어도 내고, 새로운 카피도 쓰고, 무엇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스스로는 나쁜 기억력 때문에 꼼꼼하게 기록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결국은 잘 쓰기 위해 일상의 모든 것을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남기며 아이디어의 씨앗을 만들어가는 카피라이터의 이야기다. 10년 차 카피라이터의 아이디어 매핑을 엿볼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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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장의 갈래는 각각 ‘읽다, 듣다, 찍다, 배우다, 쓰다’로 구성된다.

글을 쓰려면 일단 읽어야 한다. 1장에서는 책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담은 이야기가 쓰여 있다. 물론 아무리 밑줄을 치고 포스트 있을 붙여도 같은 책을 읽은 누군가가 특정 장면을 이야기하면 기억해 내지 못하지만.

눈으로 읽는 책이 그녀에게 영감이 되어 주었다면 이번에는 귀로 일상의 뭉툭함에 날을 세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2장의 ‘듣다’에서는 자신의 음악 취향을 세밀히 들려준다. 역시 한 곡을 몇 날 며칠 들어도 가사 한 줄 외우지 못하지만 이렇다 이야기하는 그녀의 귀와 가슴엔 이미 그날의 멜로디와 그때의 감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그녀에게 두 가지 취미가 있는데 하나는 찍는 것, 다른 하나는 배우는 것.

본인 나이보다 오래된 필름 카메라의 렌즈 너머 바라보이는 일상은 또 다른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안 그녀는, 그렇게 마주친 골목마다의 ‘벽’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책장마다 보이는 빈티지한 이미지는 모두 그녀가 찍은 사진. 여기에 그녀의 타고난 배움 유전자 에피소드가 양념처럼 곁들여진다. 야구의 ‘야’ 자도 모르는 그녀가 야구선수를 위한 응원가를 쓰기 위해 야구장으로 향한 이야기와 그녀의 상관이자 벗 박웅현 CCO 와함께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웃어버렸던 이야기는, 책으로 확인하시길.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던 경험에서 내 머리는 그 곡을 ‘기억’ 하지 못하지만, 내 몸에는 그 눈물이 ‘기록’되어있다. 책 한 권을 읽고 난 후에도 그 줄거리나 주인공의 이름은 ‘기억’ 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도 그 책을 떠올리면 심장의 어떤 부분이 찌릿한 것은 내 몸에 그 책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자전거 배우기와 같아서 한번 강렬하게 몸에 기록된 경험들은 어지간해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대망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해서 ‘써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침표 하나에도 몇 날 며칠을 고민해야 하는지 바닥, 광고의 현장에서 쓴다는 것의 의미를 풀어낸다. 말한 마디 하면 끝나버리는 시간 15초. 이 찰나의 순간을 지배할 그 한 문장을 위해 수백 개의 감각과 기억을 사용하는 김민철 카피라이터의 이야기는 그녀의 책을 읽는 이에게도 일상의 숨은 자극을 즐기게 한다. 우리의 월화수목금퇼이 맹숭맹숭 지루한 싸움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고른 책한 권처럼 그렇게 양념 같은 시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지금까지 <모든 요일의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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