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0년의 시간을 아로새긴, 태국 두 번째 왕국의 수도 아유타야.
오늘은 ‘아유타야’ 투어를 가기로 한 날이다. 처음 숙소에 도착한 날부터 친구는 아유타야 투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태국여행을 즐겨하는 친척에게서 들은 고급 팁이란다. 우리는 5박 6일의 일정 중 하루를 투어를 위해 비우기로 했다. 현지에 있는 한국 여행사의 홈페이지에서 투어 신청을 했고(이 모든 예약은 역시 똑똑이가) 그렇게 대망의 셋째 날 아침, 아주 이른 아침, 우리는 집합장소로 출발했다. 방콕의 평일 오전 6시, 이곳에서 역시 아침을 여는 사람들로 아직 새벽빛이 채 걷히지 않은 길가는 분주했다. 가게 앞을 청소하는 사람들, 교복을 입은 학생들, 출근하는 직장인들. 여느 곳의 평일 아침과 다를 바 없는 부지런한 일상에 잠시 시선이 머문다.
사념이 비집고 들어오기 전 택시가 멈춘다. 나이스 타이밍. 약속 장소는 방콕의 한인타운 앞이었다. 익숙한 한글간판이 즐비한 상가 앞에 서있자니 하나 둘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쭈뼛쭈뼛 모인다. 그렇게 여행사에서 준비한 미니밴을 타고 우리는 드디어 아유타야로 향했다.
아유타야 역시 특별한 배경지식 없이 무작정 따라 나선길이다.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현지인 가이드의 설명만이 살길이었다. 오, 그런데 이럴 수가. 분명 그는 영어로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아유따야’라는 단어 외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영어를 태국어처럼 이야기하는 가이드 할아버지의 설명에 나는 그저 아유타야의 풍경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아유타야는 태국 두 번째 왕국의 수도였다. 방콕 도심에서 한 시간 반쯤 되는 거리. 400년간 수도를 지켜온 아유타야 시대의 화려한 역사가 가득한 곳이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경주와 비슷하지 않을까, 경주 시내 곳곳에 흩어진 신라시대의 화려한 유적지처럼 이곳 아유타야 역시 아름다운 건축물이 곳곳에 모여 있었다. 그래서 도보로는 관람이 불가능하고, 이렇게 투어버스를 타고 놓쳐서는 안될 주요 유적지들을 둘러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햇빛을 가릴 건물 하나 없이 드넓은 아유타야의 한낮. 왕궁에서의 더위는 이곳과 비견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햇빛의 강렬함에 아득해져 오는 눈 앞. 이동하는 미니밴은 에어컨을 켤 수 있었지만 관광하는 동안 땡볕에 주차되어있다. 후끈한 공기를 가득 머금은 버스에 오르는 순간 그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살갗에 들러붙는 뜨끈한 시트에 앉아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한 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아,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유타야의 진미는 야경이라고.
그렇게 우리는 첫 번째 도착지인 ‘왓 쁘라씨산펫’과 옛 왕궁터에서 투어를 시작했다. 왓 쁘라씨산펫은 아유타야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왕실의 사원으로 왕의 유골을 모시고 있다. 범상치 않은 건물의(탑이라고 하기엔 그 규모가 꽤 크다.) 외관이 풍기는 장엄함에는 오랜 세월을 꿋꿋이 이겨낸 어떤 영겁의 시간이 둘러져 있었다. 이곳 역시 온전히 보존되었던 것은 아니다. 아유타야 대부분의 유적지는 버마가 침입했을 때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왕궁 역시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기도 했지만 미얀마의 침공 때 대부분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도착지는 ‘왓 랏차부라나’. 1424년, 왕위 자리를 두고 싸우다 죽은 두 형제를 위해 만들어진 사원이다. 기우뚱 비스듬히 휘어진 탑들이 위태롭지만 넓은 들판을 메운 아스라한 조형물들을 한데 둘러보면 감탄이 절로 새어 나온다. 사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나무뿌리에 얼굴만이 덩그러니 묻혀있는 진귀한 모습의 불상, ‘왓 쁘라마하탓’이다. 나무뿌리가 땅 위에서부터 자라나 얼기설기 얽힌 기둥에 불상의 머리가 휘감겨 있다. 원래부터 나무와 한 몸인 듯.
이곳에 보이는 수많은 불상들은 모두 머리가 잘려있다. 아유타야 곳곳에 심심찮게 보이는 목이 잘린 불상은 14세기경 버마군이 침략했을 당시 금으로 만들어진 불상의 머리를 도려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곳곳에 보존된 잘린 머리의 불상들이 여행객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옛 왕조의 유물이자 침통한 범죄의 현장이다. 그래서일까 왓 쁘라마하탓에는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으로 된 불상의 머리를 잘라가던 버마군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불상이 있어 다시 찾아왔더니 나무뿌리가 불상의 머리를 휘감아 지켜내고 있었다는. 왓 쁘라마하탓은 아유타야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상징물이다. 머리만 남은 불상의 엷은 미소에는 해탈과 용서와 열반이 깃들어있다.
이번 코스에서는 가장 긴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꽤 넓은 면적인 만큼 우리는 모든 곳을 다 둘러보려고 하기보다 천천히 감상하기로 한다. 쾌청한 태국의 하늘 덕분일까, 고대 유적이 뿜는 아우라 때문일까, 단지 아이폰만으로 어떻게 촬영해도 사진은 놀랍게 표현되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바닥에 널브러져 낮잠을 자는 개들이 적잖이 보인다. 그래 너희도 얼마나 덥겠니. 몇몇 개들은 땡볕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자세 살펴보니 피부의 약한 곳마다 피부병으로 인한 상처가 보인다. 안쓰러운 마음에 얼음 조각을 하나 건네주었는데, 이 의도를 알리 없는 개는 돌을 던지는 줄 알았는지 풀쩍 뛰어 자리를 옮긴다. 괜히 잠을 깨운 것 같아 미안하다. 건강하게 살다 가면 좋겠구나. 문득 한국에 있는 우리 개가 보고 싶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 오후가 훌쩍 넘어가자 슬슬 피로가 몰려든다. 아유타야 투어가 끝나면 미니밴은 여행객들을 카오산로드 입구에 내려준다. 오늘은 나를 경이롭게 만들어준 그 타이마사지샵에서 긴긴 투어 동안 쌓인 피로를 풀어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