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안녕, 내 인생 첫 방콕

#6. 마지막 한 톨의 즐거움까지 긁어 가다.

by 김현임

믿을 수 없다. 오늘이 그 날이라니.

오늘은 12월 31일. 어느덧 2015년의 마지막 하루이자 찬란했던 방콕 여행을 마무리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간 쉴 새 없이 보고 먹느라 고르지 못했던 지인들의 선물을 오늘 사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의 쇼핑 스팟은 씨암. 그전에 센트럴 엠바시에 다시 들르기로 했다. 운명의 한정판 선글라스를 마주했던 그 편집샵에. 나 못지않게 그곳에서 찾은 클러치에 꽂혀버린 동행의 구매욕 덕분에 떠나기 전에 그 물건을 다시 한 번 써볼 수 있게 되었다. 아, 이거 볼수록 내 것이다. 얼굴형에도 잘 어울릴뿐더러 착용한 모습을 본 동행들 역시 잘 어울린다는 말로 확신을 심어준다. 그래, 결심했다. 나는 이것을 사고야 말겠다! 애달아하는 내 모습을 본 동행이 모자란 액수를 빌려준 덕분에 그렇게 그 물건은 결국 나의 품에 안겼다. 아 이뻐라. 백발이 만연한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고이 간직하련다.



가장 피곤했던 하루의 큰 활력소가 되어준 상쾌한 나의 코끼리 치마. 한국의 여름에도 입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 도착한 씨암은 쇼핑의 메카라는 명성답게 사람도 차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BTS 씨암 역 바로 코앞에 위치한 ‘씨암 파라곤’은 대형 백화점에 가까운 쇼핑센터. 널찍한 야외 행사장은 하루 남은 연말을 즐기기 위해 쏟아져 나온 관광객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가이드북을 보고 찾아갔던 터미널 21에 비하면 정말 씨암의 쇼핑센터들은(씨암센터를 비롯해) 그 규모가 대단하다. 입점해 있는 브랜드들 역시 젊고 트렌디한 브랜드 위주로 이루어져 쇼핑을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쇼핑에 앞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몰아치는 인파를 뚫고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이다. 나는 오늘 그 어떤 날보다 피곤했다. 이때 필요한 건 역시.






다음 행선지로 옮기기 전 태국에서의 마지막 마사지를 받기로 한다. 시내 쇼핑센터에 근접한 이 발 마사지샵은 늘 그렇듯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고,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마사지사들이 그들의 발을 주무르고 있는 동안에도 손님은 계속해서 밀려 들어왔다. 우리 일행 역시 짧지 않은 대기시간 후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내 발을 붙든 마사지사 너머로 보이는 여인의 팔에 시선이 멈춘다. 피부가 유독 검은 그녀였지만 누가 보아도 눈 밑에 그늘진 피로는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녀의 표정을 무어라 형언하기 어렵다. 묘한 그늘이 드리워 있다. 멍하니 쇼윈도 밖을 바라보며 그녀는 그 붐비는 인파 속에 잠시 동안 서 있었다. 자신의 오른팔을 계속해서 천천히 주무르며. 하루 종일 남의 발을 주무르며 일하는 동안 그녀에겐 얼마의 수당이 떨어질까, 마사지 후 건네는 팁이 그녀의 그늘을 거두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내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는 마사지사의 손아귀를 내려다보며 나는 조금 숙연해지고 만다.


숙소에 들러 짐을 찾기 전까지 우리는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어스름이지는 저녁에 ‘해야 조금만 천천히 져다오’ 기도하면서 서둘러 BTS에 올라탄다.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는 흥겨운 밴드 공연으로 유명한 라이브 카페, ‘JACK LIVES HERE’다. BTS 빅토리 모뉴먼트 역에 위치한 이곳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밴드의 연주를 눈 앞에서 관람하며 즐겁게 술을 마실 수 있는, 마지막 날을 마무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다. 실력 있는 밴드의 수준급 공연이 펼쳐지는 만큼 공연이 시작하기까지 30분이 넘게 남았음에도 이미 명당은 모두 만석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밴드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바 자리에 겨우 자리를 차지했다.


각자 마실 술을 주문하고 어두운 조명 아래 앉아 밴드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자니 이제 정말 여행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아쉽다. 아쉬워 죽겠다. 음악을 제대로 즐길 수나 있으려나. 그때 밴드가 도착했다. 악기를 점검하고 물을 마신다. “Hello!” 보컬의 힘찬 인사를 시작으로 드디어 공연이 시작됐다. 밴드의 이름은 Ped’s band. 태국에서 알아주는 실력파 밴드라고 한다. 그들의 레퍼토리가 시작되자 음악을 제대로 즐길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던 그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새 나는 리듬에 몸을 맡긴 채 그루브를 타고 있었으니까.


마지못해 떠나는 발걸음을 붙잡던 Ped’s band의 리듬.


정말 칵테일이든 맥주든 술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끝내주는 분위기였다. 시간에 제약이 없다면 앙코르를 외칠 때까지 머물고 싶었다. 그렇게 흥겨운 음악에 취해있을 무렵 시계는 어느새 열 시를 넘기고 있었고, 우리는 숙소에 들러 맡겨두었던 짐을 찾아야 했다. 아, 이제 정말 안녕이구나. BTS를 타기 위해 오른 에스컬레이터에서 ‘빅토리 모뉴먼트’의(승전기념탑) 불빛을 스치듯 바라보며 방콕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안녕. 안녕, 내 인생 첫 해외여행지 방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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