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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임 Oct 04. 2018

맥북

맥북으로 영화보면 얼마나 재밌게요

고물이 된 노트북을 끌어안고 씨름을 하는 내가 짠했는지 짝꿍이 어느 날 맥북을 선물해줬다.

이걸로 좋은 글 많이 쓰라며.

이럴 수가, 좋은 구두는 여자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던 지미추씨네 구두 보다 더 좋았다.

이 영롱한 것은 필시 내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게 할 것이 틀림없었다.

과연 전원을 켜는 동안 샤워를 하고 나와도 바탕화면을 보기 힘들었던 엑스-노트북과는 가히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삶의 질을 높여주고 있다.

그 보답에 힘입어 나는 좋은 글을 썼어야 했는데 통 글이 안 나온다.

이 좋은 노트북으로 지지부진한 책 작업을 끼적거리다 영화를 보는 일이 전부.

(그런데 같은 영화를 봐도 맥북으로 보는 게 더 재밌더라. 맥북 만세!)


뭐라도 해야지, 해야지, 써야지 하다가 해가 짧아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가을이었다.

열심히 살기 싫어서 느슨하게 살았더니 계절이 너무 빨리 바뀐다.

이러다 또 나이만 먹겠지. 너무 무섭다.

은근슬쩍 찾아왔던 서른도 쇼크였는데 요즘엔 계절만 바뀌어도 세미 쇼크가 온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닌데.

예뻐 죽겠는 이 노트북으로 영화를 그저 보기만 하는 건 아니다.

짝꿍이 어느 날 75만원짜리 영어회화 인강을 결제했다.

그날도 세미 쇼크가 오는 바람에 살짝 다투었는데 이전에 등록했던 인강처럼 보다 말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 같이 영어 공부를 하는 것으로 좋게 마무리했다.

그렇게 열심히 영어를 웅얼대는 짝꿍에게 영감을 받아 나도 함께 영어 ‘말하기’에 열을 올리는 요즘이다.

같은 영화를 봐도 더 재밌는 이 맥북으로.

넷플릭스에서 맘에 드는 영화를 모아 놓고(배경은 꼭 뉴욕이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 사단을 나게 한 그곳!) 배우들의 대사를 따라 하면서 말하기를 연습하고 있다.

집에서 혼자 그러고 있으면 조금 재미있으니 영어 회화에 관심 있는 분들은 따라 해보길 추천한다(단, 속도가 굉장히 빠르므로 혀에 쥐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그러니까 이 물건은 이렇게 재미있는 영어 공부를 돕고 있다.

이렇게 유용하니 모쪼록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 대책 없이 믿어볼 수밖에.

덕분에 뉴욕은 한 번 더 가지 않을까!

그땐 점원이 ‘하왈유두잉'하고 스몰토크를 걸어와도 어색하게 웃지 않을 수 있겠지!

밥 먹을 때 자꾸 와서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도 의연하게 받아칠 수 있겠지!

동양인남자 팬티 사이즈랑 서양인남자 팬티 사이즈가 같냐고 물어서 당황하게 만들었던 슈프림 직원에게 심심한 사과의 스몰토크를 걸어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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