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나의 눈부신 친구》외
사랑을 하면, 갖고 싶다. 욕심에 자꾸 움켜쥐게 되는 사람이, 물건이 있다. 하지만 무엇도 영원히 내 것일 순 없다. 아무리 다섯 손가락에 힘주어 움켜쥐어도 영원히 내 손 안에서만 빛날 수 없다는 걸 알아 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그런 체념이나 포기, 느슨함을 배우는 것이 성숙의 과정이려니 싶었다. 그러니 성숙한 어른이라면 각자 감내해야 하는 상실 하나쯤 있기 마련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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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상실 앞에서도 체념이나 포기의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성장하고 빛나기를 소원하여 그가 길 떠나기를, 익숙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를, 그래서 내 손도 놓아버리고 내 시야에서마저 사라질지언정 어디론가 훨훨 날아오르기를 응원하며 움켜쥐었던 손을 스스로 펼치는 마음도 있다. 말하자면, ‘너’를 위해서라면 ‘나’의 상실감쯤 떨치고 ‘너’의 등을 떠밀어 줄 수 있는 어른의 사랑 말이다. 처키를 만나고 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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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뒤에도 여기 살면서 우리 집에 미식축구 보러 오며 막노동하고 있으면 죽여버린다. 하루 중에 언제가 제일 행복하게? 너희 집 문 두드리기 전 10초 동안이야. 집에 네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해. 작별 인사도 없이 휙 떠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영화 <굿 윌 헌팅> 중 ‘처키’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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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기 전 10초 동안 그 친구가 집에 없기를, 나에게 작별 인사조차 없이 휙 떠나버렸기를, 행복한 마음으로 긴장할 수 있는 마음이라니! 자신에게는 없는 재능을 가진 친구가 세상에 도전하길, 무언가 시도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처키’의 대사를 들으며 저런 것이 진정한 우정이구나, 진정한 사랑이구나, 진짜로 아끼는 것이란 저런 것이구나, 막연히 감동했었다. 나라면 내 빛나는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낼 수 있을까. 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한 친구가 휙, 떠나버리는 걸 견딜 수 있을까. ‘저 친구, 훌륭한 마음을 가졌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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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한다. 우정만큼 희한한 사랑이 있을까. 어린 시절 아무 이유 없이 ‘얘가 좋아’ ‘얘가 편해’ 하는 단순한 끌림에서 시작되어 가늠할 수 없이 넓디넓은 감정의 스펙트럼이 펼쳐지는 사랑 말이다. 친근함, 천진함, 유치함, 시기, 질투, 갈등, 경쟁, 응원, 믿음, 편안함 같은 갖은 감정이 직선으로 난무하는 것을 우리는 ‘우정’이라 뭉뚱그려 말한다.
‘우정’으로 운을 뗐지만 이 책은 내게 우정에 관한 책은 아니다. 20세기 격변하던 이탈리아 사회·정치와 가부장적 권위에 짓눌린 여성의 정체성을 위한 투쟁, 좀 더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60여 년에 걸친 거대한 서사다. 그리고 내게는 무엇보다 온갖 ‘찐득한’ 날것의 감정을 체험하게 해 주고 ‘사라짐’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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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뛰어난 통찰력과 지적인 재능을 가진 ‘릴라’는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로 진급하지 못한다. 그 보다 조금(아주 조금) 나은 형편의 가정환경이라 뛰어난 학업 성취를 거두어 진학에 성공하는 ‘레누’는 노력형 모범생이다. 레누는 중학교 진학도 못한 친구 릴라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으로 공부하고,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훨씬 영리하게 학습해 뛰어난 직관력으로 도움을 주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열등감을 느낀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가끔씩 뇌가 반짝반짝하는 사람을 보면 갖게 되는 부러움과 열등감. 노력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원초적 감각으로 존재하는 그런 것들 앞에서 움츠러들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둘은 ‘쟤는 내가 알지’, ‘쟤는 나를 알지’ 하는 그런 관계로 보인다. 쉽게 말해 ‘저 둘이 제일 친해’ 하는 관계다. 소설은 노년의 레누가 릴라 아들의 전화를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연락이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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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이 릴라는 극단적이었다. 릴라는 흔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저 사라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66년이라는 세월을 통째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나의 눈부신 친구》,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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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사라짐 앞에 화가 난 레누는 생각한다. ‘좋아. 이번엔 누가 이기는지 보자.’ 스스로 모든 흔적을 지우고 사라진 친구의 소식에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한 최대한 상세히” 써 내려가겠다는 데서 이 길고 긴 이야기는 시작된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을 인생 단계로 간단히 나누면 제1권은 유년기에서 사춘기, 제2권 청년기, 제3권 중년기, 제4권 장년기와 노년기로 구분된다. 그 속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에피소드들은 너무 방대해 말하지 못한다. 다만 빈곤, 폭력, 사랑, 방황, 불륜, 시기, 질투, 증오, 의리, 성공, 실패, 좌절, 혁명, 열정, 광기 등에서 연유한 온갖 찐득한 감정이 낱낱이 전해지는 이야기라는 정도만 전하는 것을 양해하시길. 그래서 456쪽인 1권을 제외하면 2, 3, 4권 모두 600쪽을 훌쩍 넘는 페이지 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게 하는 흥미진진함과 몰입감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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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릴라의 ‘사라짐’이다. 비범한 싹수를 보이다 별안간 열여섯 살에 결혼하는 것으로 시작해 온갖 화려한 시절의 정점을 누리고 불타는 사랑도 하고 그러다 비참한 밑바닥까지 추락하는가 하면 다시 부활해 초창기 IT기술자로 성공하고 사회 운동에 뛰어드는가 하면 자식을 잃어버리는 비탄에 빠진다. 이렇게 쓰다 보니 릴라는 왜, 어디로 사라졌을까, 다시금 궁금해진다. 미리 말하자면 소설에선 그 해답을 찾을 순 없다. 다만 각자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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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무엇인가를 갈망할 줄 알았다. 원하는 것은 망설임 없이 취할 줄 알았다. 열정을 다할 줄 알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모멸감도 비웃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흠씬 두들겨 맞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릴라에게 사랑은 상대방이 자기를 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릴라는 니노를 가질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4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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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사랑에서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갈망할 줄 알고 어떤 비난이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취할 줄 아는 릴라의 삶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그녀는 여러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감정적, 신체적, 사회적 폭력에 수시로 노출되어 상처받고 분개하고 냉소하고 좌절하며 싸운다. 그러니 그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겠나.
두 사람의 이야기는 대략 1950년대 초반 나폴리의 가난한 동네에서 시작되어 1960년대 초중반의 산업화와 도시화, 계급 이동의 시기를 다루고, 1970년대의 학생·노동자 운동과 급진 정치와 폭력, 여성 해방 운동, 1980~2010년대 초반까지의 나폴리 마피아와 도시 재개발, 격변하는 정치, 새로운 불평등을 다룬다. 이런 시대적·사회적 배경 아래 여성의 몸과 목소리는 가정·가족·결혼·폭력·노동의 현장에서 자주 사라지고 그들의 정체성은 가족이나 일, 규범 속에서 지워진다.
릴라는 늘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싸운다. 그 속에서 “경계의 해체” “흐릿해지고 싶어” “지워지고 싶어”라는 말로 사라짐에 관해 토로한다. 그녀의 그러한 갈망은 외부 세상에 침범당해 자기 고유의 빛이 점점 흐려지는 것에 대한 결론 같다. 누구보다 주체적인 성향을 가진 그녀가 짓밟히고 밀려나며 사회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기능’으로만 남길 강요당하는 과정에서 느낀 모멸과 고통에서 비롯된 자구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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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는 낙서 위에 덧쓴 낙서일 뿐이야. 네 책에 적합하지 않아. 그러니 나를 내버려 둬, 레누. 사람들은 소멸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은 하지 않아."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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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릴라에게는 자신을 소재로 글을 쓴 친구 레누조차 자신을 억압하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녀가 그토록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을 반대한 것은 자신의 삶을 타인이 임의로 재구성하고 해석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박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테다. 그러니 “낙서 위에 덧쓴 낙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남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사람들은 소멸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은 하지 않아”라는 말은 사회가 이 여성의 소멸 경험을 드러내길 꺼리고 외면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녀 자신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것인데 아무리 사랑하는 친구에 의한 것이라 해도 규정되고 박제되길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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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몸을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나. 나이가 들수록 릴라를 잘 모르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나.”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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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것과 별개로 우리는 모두 사는 동안 점차 희미해지는 존재다. “몸을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사는 동안 점점 욕망과 목소리를 억누르고 희미해져 가는 존재가 되는 무상함을 받아들이는 법이자 세상이 나를 향해 쏘아대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생존 기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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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누, 나는 평생 그런 순간에 저항해왔어. 마르첼로가 두려우면 스테파노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고 스테파노가 두려우면 미켈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어. 미켈레가 두려우면 니노를 이용해서, 니노가 두려우면 엔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해왔어. 사실 보호라는 말 한마디로는 부족해. 내가 몸을 감추기 위해 지금껏 꾸며낸 크고 작은 일을 네게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거야. 결국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지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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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짐작하기 쉽지 않던 릴라의 내면이 단 한 번,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은 나폴리 대지진 때다. 지진 앞에 공포에 무너진 릴라가 쏟아냈던 많은 말에서 그녀가 세상을 사는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몸을 감춘다는 건 끊임없이 정체성, 욕망,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것과 맞닿아 있는데, 릴라의 그런 공포와 마주해 레누는 친구의 적나라한 내면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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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릴라가 한 모든 노력은 결국 자기 형태를 잃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조종했는데도 액체가 범람하면 릴라는 스스로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럴 때면 혼돈만이 유일한 진실이 되었다. 그렇게나 활발하고 용맹한 릴라는 사라지고 겁에 질려 무(無)가 되고 말았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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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관계를 두고 보면 릴라는 언어로 기록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흩어지고 지워짐으로써 자유를 얻으려 한다. 레누는 언어로 기록하고 글로 써 자신들의 이야기를 붙잡아두려 한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 릴라는 마침내 어느 날 레누의 아파트 우편함에 어릴 적 둘이 가지고 놀았던 인형들을 둔다. 여전히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그 인형들만으로 자신을 명확히 드러낸 친구가 원망스러웠을까.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레누는 친구의 거취를 두고 원망 섞인 짐작도 하고 애정과 믿음에 근거한 짐작도 한다.
개중 내 마음에 드는 짐작은 “세계를 여행하며 새로운 진실에 따라 젊은 시절 다른 사람들 때문에 또는 자기 자신 때문에 누리지 못했던 삶을 살아가면서 늙어갈 것”이라는 짐작이다.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렸던 그 명민하던 영혼이 모든 그물에서 벗어나 그녀가 원하던 대로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몸을 숨겨 완벽히 자유롭게 살길 나 또한 바란다. 그렇게 늙어가길 바란다. 그렇다고 사라진 친구를 굳이 “기억하는 한 최대한 상세히” 기록하고 글로 남기려는 레누가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둘 다 어른이 되는,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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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제4권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우정과 사랑, 성장과 상실, 기록과 소멸이라는 주제는 결국 한 점에서 만난다. 살아간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라져 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며, 동시에 누군가를 기억하고 글로 남기는 일이다. 릴라는 '사라짐'으로 자유를 찾고, 레누는 기록하고 글로 써 존재를 붙잡는다. 나는,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어른이 되며 살아갈까. 언젠가 누군가를 놓아 보내야 할 때, 혹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점점 희미해질 때, '사라져 자유로운 것'과 '기록되어 지속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까.
**인용글 출처: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한길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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