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질

17화. 앤드루 포터, 《사라진 것들》

by 김편

2024년 4월, 부다페스트였다. 온 도시가 반짝이고 리듬에 흔들렸다. 먼 이국의 주말 밤, 멀리 자동차 행렬도 반짝이고 노란색 트램도 반짝이며 달려갔다. 강 건너 그 유명한 ‘어부의 요새’도 주황빛으로 찬란히 빛났다. 유장한 도나우강 물결도 반짝이고 그 물결 위 더 화려한 불빛의 유람선 창문으로는 춤추는 사람들의 흥겨운 몸짓이 흔들리며 반짝였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한 우아한 여배우가 시상식에서 벅차게 외쳤다는 수상 소감이 떠오르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 아름다운 밤. 함께 여행 온 선배는 피곤하다며 먼저 숙소로 들어가고, 나는 날 저문 강가 벤치에 앉아 맥주 한 캔과 피자 한 조각으로 저녁을 해결하며 그 몇 달 전 돌아가신 엄마 생각을 했다. 분주하고 빛나는 것투성이들은 희한하게 혼자 조용하고 혼자 요요(搖搖)했다.


버스킹 하는 이들의 노랫소리, 기타 소리, 바이올린 소리, 맥주병 기울이며 웃는 소리, 유람선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벤치에 앉아 수다 떠는 소리, 농구 골대를 향해 달려가는 소리, 농구공 튀는 소리, 조명에 반짝이는 화단, 가로등과 바람결에 반짝이는 나무, 침묵하며 빛나는 트램 선로, 일렁이는 물결, 강변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그 소란하기도, 고요하기도 한 정취에 젖어 한 곳에 오래 앉아 있었다. 그래, 소란하면서 고요하기도 한 정취였다. 그 강변의 모든 각자가 자기만의 밤을 품어서 흥겨운 것은 흥겹고 고요한 것은 저리 고요하구나 싶었다.


갑자기 한쪽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쉼 없이 사진을 찍다 터트린 웃음이었다. 휴대폰으로 서로를 찍으며 웃고, 이렇게 저렇게 동작을 취하며 웃고, 찍은 것을 돌려 보며 웃다 기함할 모습이라도 있었는지 돌고래 같은 비명을 지르며 박장대소했다. 20대가 분명해 보이는 그들의 소란을 보며 ‘젊다, 어리네, 귀여워’ 생각했다.


“밖에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젊은이들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는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된 것일까?

-<오스틴>, 21쪽


그러게. 친구의 등이나 팔을 찰싹대며 큰 소리로 웃고, 꺄아-꺅 소리치며 이야기하고, 허공에 고함을 지르는 것은 젊을 때였다. 그런 걸 새삼 깨닫는 문장을 만난 건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에 실린 단편 <오스틴>에서다. 내 젊은 날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른 기억은 없지만 자주 격렬하고 쓸데없이 극단적이고 유치하게 비장했던 기억은 있다.


<오스틴>의 화자인 ‘나’도 이제는 그렇게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인 나이가 되었다. 텔레비전과 오디오와 책이 벽을 가득 채운 가족실에서 책과 와인 한 잔, 또는 칵테일 한 잔을 들고 앉아 있는 시간이 “인생의 단순한 즐거움”이 된 나이. 그런 평안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뭔가 잃어버린 듯도 한 나이다.


어쩐지 더 큰 목적에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벽 바로 뒤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더욱 거대한 부재의 울림이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이 늘 있었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오스틴> 21쪽


중년의 나이에, 다가올 노년을 짐작하는 일은 아무래도 좀 추상적이어서 그나마 ‘내가 해 봐서 아는’ 청년기를 되돌아보는 것이 익숙하다. 그러다 보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기여나 경제적 성취 같은 것들이 미흡해서 하는 후회도 후회지만 의외로 나는 하찮은 것들이 아쉽다.


가령, 파랗고 노랗게 머리에 염색을 해본다거나, 좋아한 사람에게 좌고우면 하지 않고 애정을 퍼부어본다거나, 1~2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 본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이런 것들이 집을 마련하거나 노후를 준비하거나 안정적으로 생계를 마련하는 일들에 비하면 얼마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었나를 생각하면 발을 동동 구를 만큼 아쉽다. 까짓것 그게 뭐였다고, 다 해 볼 걸…. 이런 것이 ‘회한’이라는 그 쓸쓸한 말의 감정일까.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에 실린 15편의 단편은 모두 시간에 실려 가 이제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것 같다. 청춘, 사랑, 열정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같이 쓸쓸한 것은 예전에 떠나보냈거나 지금도 떠나보내고 있거나 앞으로도 떠나보낼 것들이라 그렇다. 죄다 마침내 그리워만 해야 할 것들이라 그렇다.


나는 서른한 살이었고 내 일을 좋아했다. 내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마야와 함께 있는 한 그저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다른 사람의 예술에 소소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넝쿨식물> 53쪽


살다 보면 내 빛을 따라가는 것보다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경이로운 순간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소중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연인의 재능에 퀀텀 점프가 일어나는 순간을 함께 맞는 기쁨, 그 스토리와 내가 분리될 것을 예감하며 느끼는 “혼란스러운. 슬픈. 불확실한” 감정.


“86번가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들의 아파트 건물 가장자리가 보이면, 두 사람이 아직 깨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깨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늘 어떤 긴장된 설렘을 느꼈다가, 아파트 이층의 불 켜진 창문이 마침내 보이면서 그들이 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찾아오던 그 편안함.” -<라인벡>, 128쪽


별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떠올리면 가슴이 가득 채워지던 그날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넌 그다지 다르지 않아.” 칼리가 말했다. “우리 둘 다 그래.” -<히메나> 287쪽


과거 기억 속 나는 어디로 가고 어느 순간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는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대니얼을 떠올리며 그 친구가 벌써 얼마나 그리운지, 그의 얼굴을 얼마나 보고 싶은지, 대니얼이 없는 내 인생을 상상하기가 벌써 얼마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지 생각했다. 소중한 나의 친구. 인생의 다른 수많은 일에서는 그토록 운이 좋았으나 한 번의 지독한 일격을 당한,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나의 친구. 대니얼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그의 수영장에 우리는 있는데 그는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부당하게 느껴졌다. -<사라진 것들> 325쪽


사라진 친구,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나의 친구”가 선택한 침묵이라면 그렇게 보내주어야 하는 날도 있다. 이 소설집의 여러 인물들은 각자의 삶을 산다. 얼마나 뜨거웠든, 얼마나 차가웠든, 얼마나 씁쓸했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제 삶을 받아들이며 산다. 간혹 일상에 생긴 균열 앞에 흠칫, 낯설어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러곤 다시, 산다.


젊은 날을 아주 허투루만 보낸 것 같지도 않은데 나는 가끔 그 시절의 어느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스르륵, 사라진 것 같다. 아니 가진 것도 몰랐는데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존재할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을 그리워하자니 헛헛하다. 그곳에 두고 나만 떠나온 느낌이랄까. 무언가 내게서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진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 문득 마음이 저민다.


동사 ‘저미다’는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얇게 베어 내다”는 뜻과 “칼로 도려내듯이 쓰리고 아프게 하다”는 뜻,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다”는 뜻이 있다. 고기와 생선을 저미고,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저미고, 애간장과 마음을 저밀 때 쓴다.


고요할 막(寞) 자를 쓰는 형용사 ‘막막하다’는 “쓸쓸하고 고요하다”는 뜻, “의지할 데 없고 외롭고 답답하다”는 뜻, 꽉 막힌 듯이 답답하다는 뜻이 있고, 사막 막(漠) 자를 쓰는 형용사 ‘막막하다’는 “아주 넓거나 멀어 아득하다”는 뜻과 “아득하고 막연하다”는 뜻이 있다. 전자는 숲 속의 밤이 막막하고, 나만 홀로 남아 막막하고, 앞길이 막막할 때 쓰고, 후자는 사막이 막막하게 펼쳐져 있거나 앞길이 막막할 때 쓴다.


크게 의미 없을지도 모를 말을 읊조리듯 늘어놓는 것은 시간이 가져가 사라진 것들을 떠올리며 별 이유도 없이 마음이 저며와서다. 책장을 넘기며 쓸쓸했다 아득했다 서늘했다 막연했던 마음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정처 없어서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다 생각한다. 사랑, 배신, 성공, 실패, 열정, 나태, 도전과 패배로 채워졌던 모든 시간의 아름다움을.



**인용글 출처: 앤드루 포터, 《사라진 것들》(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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