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 이토록 단호하고 고귀한

제18화.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by 김편

자본시장의 중심, 뉴욕 월가의 한 변호사가 필경사를 채용했다. 보기 드물게 차분한 그는 처음에는 엄청나게 많은 서류를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한다. 하지만 그는 출근 사흘 만에 모든 일을 거부, 아니 거절한다. 그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그의 말은 단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분노나 무례함이 섞인 거부가 아니다. 하지 않는 편을 자신이 ‘선택’하겠다는 선언이다.


이후 어떤 설득과 간청도 통하지 않고 심지어 해고 통보조차 받아들이지 않던 필경사는 난감해하던 변호사가 아예 사무실을 옮겨 버린 후에도 혼자 그곳에 머문다. 결국, 건물 주인의 신고로 유치장에 갇힌 그는 음식도 거부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다. 이 황당하기도, 슬프기도, 오묘하기도 한 이야기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이야기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의 주인공 바틀비를 새삼 떠올리게 된 건 ‘한탸’ 때문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한탸는 삼십오 년째 폐지 압축기의 붉은색, 녹색 버튼을 누르며 책과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희귀하고 귀한 책들도 그의 압축기 안에서 낙서로 뒤덮인 종잇장, 다 쓴 타자기 리본, 유효기간 지난 연극 티켓, 팸플릿 등과 섞여 함께 죽어간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9쪽


다방면의 온갖 지식을 압축해 놓은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린 그의 위, 지하실 천장 뚜껑문을 통해 매일 수많은 책과 팸플릿, 핏물 밴 정육점 포장지, 날카로운 필름 조각, 신문지 뭉치가 뒤섞여 떨어져 내린다. 밀려드는 폐지 더미 속에서 빛을 발하는 “희귀한 책의 등짝”이 보이면 한탸는 그 책을 건져내 그 안의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그는 지혜를 압축해 폐기하고, 그 무자비한 파괴의 과정에서 그의 뇌와 심장에 스며들고 혈관 깊숙한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 문장들로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는 창조를 이룩한다. 한탸는 그 폐지 더미 속에 《히페리온》과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피신처를 만들고, 괴테와 실러, 횔덜린, 니체의 무덤을 마련할 줄 아는 지하실의 철학자이자 지식인이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19쪽


니체, 헤겔, 예수, 프란체스코 같은 사상가들의 들끓는 사유와 감정으로 조밀하게 채워진 그의 고독은 그래서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그 시끄러운 고독의 세상이 무한하고 영원하길 바란다. 그런 그를 “추악한 골칫거리나 떠안기는 밉살스러운 고용인, 그 혐오스러운 인간” 취급을 하며 무자비하게 욕설을 퍼붓는 소장도 그를 이길 수는 없다. 그는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며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비록 매일 수 리터의 맥주가 함께하고 있지만. 그러니 그가 사는 세상은 압축 기계 앞에서 고독할지언정 폐지 꾸러미 각각의 한가운데에 “철학자의 책을 활짝 펼쳐 올려”두고 활기 넘치는 생생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사는 것 외에는 달리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서로 합의를 본 것 같았다. 이 세상에 함께 온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떠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81쪽


젊은 시절 그의 사랑은 어린 집시 여자였다. 조용하고 순진하고, 더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 집시 여자와 살았다. 한 번도 그의 집 열쇠를 가져본 적 없고 그의 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 같은 사소한 것 외에 바라는 것도 없던 그 여자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어느 수용소의 소각로에서 태워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생각한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85~86쪽


한탸는 하루 종일 폐지를 압축하면서도 그 속에서 글을 읽고 철학하고 사유하며 인간의 존엄과 무게를 고민한다. 그의 삶은 겉으로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로만 채워져 고독해 보이지만, 내면은 많은 감정과 기억, 철학과 사유로 고독조차 고요할 수 없도록 깊고 격렬하다. 이렇듯 자기만의 세계를 지닌 존재는 화려하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지만 무너지지 않는 자존감을 지닌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상이 있고 자신만의 방식을 지키며 산다.


삼십오 년을 잉크와 얼룩 속에서 일해온 내가,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내가, 이제 비인간적인 백색 꾸러미들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다니! -106쪽


그런 그의 세상에 균열이 일어나는 건 어느 날 도시에 가서 거대한 압축기와 그런 거대한 압축기를 갖춘 신식 시설에서 유니폼을 입고 폐지를 압축하는 젊은이들을 확인했을 때다. 코카콜라를 마시며 곧 떠날 그리스 휴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은 그가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는 귀한 책들은 들춰보지도 않고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될 일은 추후도 없어 보이는 새 인간, 새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새 시대의 막이 오른 광경 앞에서 그는 이제 요절할 책들의 운명과 늙은 압축공의 세상이 저문 것을 직감한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바꾸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단면이 내 늑골을 뚫고 들어온다.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온다. -131쪽


그의 세상은 그의 것이다. 제 세상의 종말 앞에서 그는 자신의 지하실, 그 천국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끝내 압축기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어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을 거부한다. 이 글의 앞에서 바틀비가 떠오른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바틀비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며 보여준 것은 타협하지 않은 고유한 존재 방식이다. 한탸 역시 스스로 압축기 안으로 들어가 죽음을 택해 보여준 것은 체제와 세계가 끝내 용납하지 않은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다만 바틀비가 세상과 철저히 단절하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라면, 한탸는 죽어서라도 자신의 세상을 지켰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까.


두 인물 모두 죽음을 택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이 패배만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들이 보여준 고유한 존재 방식, 그리고 자신만의 세상을 선택하는 방식이 그들 자신의 존엄을 지킨 것으로 보여서다. 이 책의 권두에는 괴테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태양 표면의 흑점은 태양의 어두운 반점이지만 그 흑점이라는 어둠을 지니고도 태양은 가장 찬란하다. 그러니 흑점은 그러고도 제일 빛날 태양만이 지닐 수 있다.


인간은 때로 죽음이라는 어둠을 삼켜야 하더라도 자신의 존엄을 끝내 놓지 않는다. 스스로 압축 기계로 들어간 한탸도 폐지, 책들과 함께 자신을 압축해 자신만의 세상에 함께 봉인된다. 바틀비 역시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단호한 거부의 언어와 스스로 죽음을 택해 자신의 존엄을 선택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생산성, 효율성, 복종을 거부하고, 세상과 단절해 자기 내면의 고요 속으로 잠긴다.


이 책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은 체코의 대표적 작가다. ‘프라하의 봄’ 이후 망명을 택했던 많은 다른 작가와 달리 끝까지 체코에 남아 체코어로 글을 써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리기도 한다. 냉전 시기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검열과 탄압을 받아 그의 책들은 출판 금지되거나 지하에서만 유통되었다. 지식인이면서 육체노동 일을 전전했던 그의 개인사를 생각하면 주인공 한탸의 삶과 죽음은 지식과 예술이 억압받는 시대 속에서 그 가치를 지키려 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인용글 출처: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문학동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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