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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실생활자 김편집 Sep 17. 2015

#05 몽블랑

ⓒkimeungyoung



"우와~ 이 만년필 좋으다."

"좋지? 워터맨이야. 그런데 중고로 팔아버리려고."

"왜요? 필기감 완전 좋은데? 중고로 얼마요? 제가 사까요? 흐흣"

"진짜? 생각 있어? 만년필이 많은데 이번에 또 좋은 놈을 하나 장만했지."

"좋아요! 제가 살래요."

"음. 됐다. 안 팔란다."


뭐야, 간 본거야? 휑하니 돌아서 가는 얄미운 직장 선배 B의 뒤통수를 보며 황당해하는 나를 당시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던 술멤버 A선배는 마음에 남았었나 보다.


몇 달 뒤 A선배가 부르더니 모니터 화면에 펼쳐진 만년필들 중 두 가지를 가리키며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 물으셨다. 오~ 몽블랑? 뭐예요? 이게 좋으네. 금보단 은이 예쁘다며 한쪽을 척 가리키는 나에게 A선배는 "은이 아니라 백금이거든? 그게 더 비싼 거야. 눈은 높아가지고." 그러시며 이건 사면 이니셜도 새겨준다며 이니셜 뭐 쓰냐고 물으셨다. 엥?!!!


 "저요? 제 이니셜요? 제 이니셜은 왜요?"

"새겨줄게. 말해봐라."


변명하자면, 나는 정말이지 그 만년필을 A선배가 '사서' 주실 줄은 몰랐다.

그때 다니던 회사는 음주가무 중 음주문화만 유독 강화된(?) 회사였고 A선배는 강성 소주파였는데, 그 당시엔 한참 와인에 취미를 들여 공동구매 같은 걸로 한 박스씩 주문하던 때였다. 여담이지만, A선배는 내가 아는 가장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는데 그 지식과 상식의 폭이 넓을 뿐만 아니라 깊이가 얕지도 않아서 자주 감탄했었다. 그러니 와인에 취미가 생겼다는 건 맛에만 빠져들었다는 것은 아니고 이런저런 책도 읽고 자료도 보며 상식을 더 넓혔다는 말.


어쨌건 갑자기 왜 와인 이야기로 빠졌냐면 그 정도로 한참 와인에 몰두하셨을 때니 소위 단골 고객이 되셨을 거고, 그런 근거로 나는 A선배가 와인 구입을 하며 무슨 경품 같은 것으로 몽블랑 만년필 하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뭐 이런 추측을 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자전거나 만년필 중에 하나 선택, 뭐 이런 씩으로. 공으로 하나 떨어진 만년필이 내게로 오는 건가, 하는 제멋대로인 짐작이었다고나 할까.


"은상아, 내가 돈이 많거나 부자라서 이런 선물하는 거 아니다. 알아둬. 나도 큰 마음 먹고 선물하는 거야. 네가 이걸 제일 좋아할 것 같아서. 내가 최근에 어디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하나 깨달은 게 있는데 선물이란 건 내가 뭘 주고 싶은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가 뭘 받으면 가장 기뻐할 것인가가 중요하더라는 거지. 너한테 뭘 하나 해주고 싶었는데 니가 이걸 받으면 제일 기뻐할 것 같더라고. 부담은 갖지 말고, 그래도 나도 큰 맘먹고 한 거니까 잃어버리지는 말고 잘 써라."


하며 건네시는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쇼팽 145.

내겐 몹시도 과분한 만년필이었다.


"아... 그래도... 진~짜 이거 사서 주시는 거예요?"

"인마, 그럼 그걸 누가 그냥 주냐. 그리고 내가  얼마 전에 B랑 네가 이야기하는 거 옆에서 들으니까 그 자식이 약만 살살 올리고. 그냥 주면 되겠두만. 아~ 얄미워서. 이제 가봐라."


와인 경품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새 몽블랑 만년필을 받고는 A선배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도 긴가민가 얼떨떨하기만 했다. 내 기준에선 너무나 고가의 만년필이라 후덜덜. 평소 무뚝뚝하기만 했던 그 선배가 왜 하필 그때 선물을 하고 싶어졌을까. 정확한 사정이야 모르겠어도 평소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못난 후배가 긴 짝사랑을 호되게 거절당한 걸 귀신 같이  눈치채고 안쓰러웠을까, 아니면 그때 내가 개인적으로 뭔가 공부하던 것을 결실 맺을 무렵이었는데 그걸  눈치채시고 격려해주고 싶으셨을까. 그럴 리가... 둘 다 눈치챌 리가 없었을 텐데. 아직도  한 번씩 궁금하다. 어쨌건 그때 그 선배의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위로를 주었었다. 몽블랑 만년필이어서가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내 주위에는 여전히 마음을 나누어 주고 마음을 써주는 친구, 동료들이 있다는 위안. 그러니 내 인생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안도. 그런 소중한 위로를 받았었다.     


그 후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 할 때 저 사람이 뭘 받으면 가장 기뻐할까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저 사람이 무엇에 가장 기뻐할까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금이 어떠한가를 살피는 일이며, 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해보려 내 마음을 써서 관심을 가지는 일이다. 친구인, 가족인, 사랑인, 동료인 그 누군가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일.


그래서 항상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면 큰 감동을 줄 수 있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최고로 기뻐할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도 끝끝내 잘 모르겠다는 어이없는 결말에 봉착하곤 허둥지둥하다 무난한 선물을 하곤 했으니까. "못났다, 못났어." "아, 그걸 왜 생각 못 했지?" 혀를 끌끌 차며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기 일쑤다. 하지만 최대한 마음을 담으려 애쓴다. 내가 함께 기뻐한다는, 함께 슬퍼한다는, 힘을 주고 싶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다는 마음이 담기도록.   





"할아버지~ 생신 축하해요!"

축하의 마음을 담은 소박한 꽃다발, 할아버지의 휴식을 위한 쿠션, 싱싱한 야채와 감자... 분명 엄마가 들려주었을 것들을 손에 들고 할아버지 댁 앞에서 아이들은 꺄르르르 재미있다(저 천으로 덮인 바구니엔 방금 구운 따끈따끈하고 고소한 빵이 들어있으면 좋겠다). 오늘은 특별한 날. 엄마가 시킨 대로 들고 간 것들을 내밀며 사랑하는 할아버지에게 "Happy Birthday~"를 외치는 재미있는 놀이(?)에 개구쟁이들은 마냥 즐겁고, 이 귀염둥이들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도 마냥 흐뭇하다. 그의 마음은 한순간에 가득 찼다.


Frederick Morgan(1847/1856~1927), Grandfather's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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