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아, 너 그게 뭐야? 어디서 가져온 거야?"
"ㅁㅁ이 베개야. 내가 빌려왔어."
"아니, 친구 베개를 가져오면 어떡해? 그걸 왜 가져와?"
"이 베개가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하루 빌려왔어."
"아니 그럼 ㅁㅁ이는 오늘 뭐 베고 자라고. 쟤가 왜 저래, 쯧쯧."
3~4학년 무렵이던가. 방학이라 놀러 간 외삼촌 댁에서 벌어졌던 풍경이다. 엄마와 막 도착해 외삼촌, 외숙모께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친구 집에 놀러 갔다던 외사촌 동생이 엉뚱하게도 베개를 껴안고 들어선 것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는데 그 엉뚱함이 너무 귀여워 오래도록 그때의 일이 한 번씩 생각난다.
생활용품에 대해 무지한 편이라 별생각 없이 골랐다가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잘 고르든 못 고르든 딴에는 꽤 신경 써서 고르는 것 중 하나가 베개. 어깨 통증을 지병처럼 안고 사니 잠자리, 특히 베개 높이나 베고 누웠을 때의 착용감에 집착한다.
안타까운 점은 애쓰는 것 만큼 물건을 보는 눈은 없어서 지금 베고 있는 것은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베개. 적당한 높이와 목과 어깨에 착 달라붙는 베개를 만나 푹 자고 아침에 개운하게 한번 일어나 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다.
내 인생에서 기억나는 베개 중 하나는 아버지의 팔베개. 아버지의 팔베개가 최고로 편했다, 하는 훈훈한 추억의 이야기는 아니고. 누구나 좀 그렇지 않은가? 팔베개는 대주는 사람이나 베는 사람이나 대체로 불편한. 그럼에도 그 이미지가 주는 다정함 덕분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한. 내게 아버지의 팔베게는 아버지의 팔베개를 베고 했던, 끝간 데 없이 펼쳐지는 상상 놀이의 기억과 함께한다.
어릴 적 아버지는 한가로운 날이면 한 번씩 동생과 나를 양팔에 한 명씩 팔베개를 베어 눕히시고는 눈을 감으라고 하셨다. 눈을 감고 지금부터 아빠가 말하는 것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라시며.
"벼들이 누렇게 익어서는 너른 논이 황금빛으로 쫘악~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 저어기 멀리에는 집이 한 채 있고 엄마가 우리 보고 맛있는 거 해놨다고 막 부르는 거라. 그러면 우리는 팔을 쫙 펴고 막 달려가지... 땀도 송골송골 나고 그러면 저 황금들판에서 싸사싹싹~ 벼들을 스치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캬~ 시원하겠재? 머릿속으로 생각해봐라. 막 뛰어가면 얼굴로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히고, 저 멀리서 맛있는 냄새도 막 풍기고, 손끝으로 벼들이 따꼼따꼼 스치고..."
어떨 땐 그때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풍경이 상상이 아니라 정말 있었던 일인 양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릴 때의 상상놀이가 꽤 인상적으로 남아있나 보다. 나이를 먹어도 그때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하던 장면이 한 번씩 떠오르며 기억나고 그러면 기분이 좋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시원한 방바닥에 아버지 팔베개를 베고 누워있던 평화로웠던 그 어느 날이 절로 웃음 짓게 해주니까.
꿀잠을 잘 수 있는 폭신하고 편안한 베개 하나가 유독 아쉬운 밤이다.
수확철,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었을 노동으로 젊은 부부는 정신없이 낮잠에 빠져들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을 한껏 품어 무르익은 가을의 이삭을 무사히 떨어내고 책임을 다한 짚더미가 가볍고 푹신하다. 온 힘을 다 써버린 젊은 농부의 고된 육체는 깊은 잠에 취해 입이 절로 벌어지며 단단한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농부의 아내도 살짝 팔을 모아 얼굴을 파묻더니 금방 노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남편을 따라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뜬 고단한 몸을 잠시 뉘었다. 마른 짚이 풍기는 고소한 햇빛 냄새가 그녀의 꽃잠을 다정하게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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