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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실생활자 김편집 May 29. 2022

[네 번째 편지] 착각하는 사랑

k선배에게 ④

k 선배에게, 


뉴스가 넘쳐납니다.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 데도 자꾸 눈길이 가서 제 일상이 곤란할 지경입니다. 이러니 일이 바쁘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휙휙 날려버리니 시간이 부족한 것이 당연하겠지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출판계는 투정하지만, 정말 책‘만’ 읽지 않을 뿐 사람들은 ‘읽기’에 중독된 것처럼 허겁지겁 무엇이든 찾아 끊임없이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있지요. 그렇게 중독이라고 할 만큼 무언가를 찾아 읽고 있으니 그 어느 때의 인류보다 지적인 것을 탐하는가, 하면 그것은 또 별개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휘발성이 너무 강한 일시적인 정보 차원의 것을 기계적으로 읽어 들이는 것에 시간을 쓰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이 넘쳐나는 뉴스와 SNS 기사들을 습관적으로 찾고 그것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저의 자조 섞인 심정입니다. 


뉴스에서 눈을 돌려 드라마 세상을 보니 요즘은 '추앙'이라는 새삼스러운 단어로 '사랑'이 화제입니다.

당신은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며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하는 여주인공의 대사가 참, 절박합니다.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정도론 안 돼. 높이 받들어 우러러봐. 여주인공의 대사를 사전적 의미로 풀면 그렇습니다. 전폭적인 내 편, 한치의 불안과 한치의 의심도 없이 받드는 환상적인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마음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이러니 친구의 '구 씨' 사랑에 함께 동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백 년 만에 설렌다는 친구의 호들갑에 괜히 함께 신나서 BTS 설렘 어쩌고 했다가 욕만 먹었어요. 어쨌건 이 나이에도 설레게 하는 존재가 있는 게 어디냐며 친구와 저는 각자 흐뭇해졌습니다. 추앙이든 사랑이든 결국 말하고자 하는 '마음'은 한 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사랑은 물론, 짝사랑에도 목말랐던 것 같습니다. 단지 존재만으로 설레고 애타는 대상이 있어 속이 까맣게 탔던 어린 날을 추억하면서 그때는 참, 재미났다 싶은 나이가 되니 드는 생각입니다. 

 

그러다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확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에 관해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에 빠졌다고 할 때의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혹시 실제와 다르게 인식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에 대해서랄까요.  


모를 수도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기억’을 소환해보자면. 다가오던 그 사람의 발소리, 들려오던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이 미친 듯 쿵쾅댔던 그 느낌은 분명 생생했으니까요. 그런데도 그 생생했던 기억마저 착각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다만 조금 들뜨고 야릇했던 그 '기분'을 즐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현실에 두지 않으면서도 그 사랑의 감정을 이리저리 혼자 굴려 키우는, 짝사랑이란 것이 인간이 발명한 감정의 유희 중 하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 감상에 취해 대상은 점점 환상에서 이상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가고, 감정은 얼마든지 부풀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테니 결과론적으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짜릿한 감정 놀이로 짝사랑만 한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한 장소, 특별한 투자(시간+돈), 특별한 현실적 문제(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필요 없는) 없이 이만한 감정의 유희를 느끼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랑은 짝사랑에서 시작하고, 적지 않은 수가 짝사랑으로만 남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 그 감정의 유희를 즐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문득 듭니다.


사실 인간은 타인에 대한 사랑보다 사랑을 하는 자신이 앞설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은 사랑이라는 모호한 실체를 상정해두고 그 감정을 위한 감정을 향유하려던 속임수라고요.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마침내 분명히 존재한다고 증명된 것처럼 정설로 자리 잡게 되었고 어느새 우리 인간에게 사랑은 없이는 못 살 것처럼 소중한 것이 된 것은 아닐까요.


누군가를 좋아하고, 좋아하다 보니 소중하고 아끼게 되는, 그 천진난만한 감정을 선배는 믿는지 궁금합니다. 그마저 착각은 아닐까, 착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영원한, 완벽한, 진실한…’이라고 하는 사랑에 덧붙이는 수식어들은 누군가의 실제 경험일 수는 있어도 사랑의 보편적인 수식어로 가정할 수는 없다는 외로운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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