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오직 한 존재가 나를 몰라봐서①

제4화. 슈테판 츠바이크《모르는 여인의 편지》

by 김편

시인 류근은 <상처적 체질>(문학과 지성사, 2010)에서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절절한 ‘시인의 말’을 썼다. 그 짧은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온 우주의 고독이 몰려오는 것 같아 아득했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했다.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지옥일까, 와서도 끝내 나를 알아봐 주지 못하는 것이 지옥일까.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면서 외로움을 겪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습니다. -47쪽


사람이 외로울 때는 혼자여서, 혹은 누군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거나 잘못 이해할 때 더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심지어 마음을 내주고 자신을 드러내 보여줬다고 생각한 상대라면 더욱더 심한 내상을 입고 결국엔 침잠해 세상 고독한 존재가 되곤 한다.


어느 가을, 짧은 여행 중 제주 송당 마을에서 친구와 하룻밤을 보냈다. 이리저리 마을을 둘러보다 ‘서실리books’라는 작은 동네서점에 들렀다. 서점 특유의 고요하고 느린 공간에서 나도 함께 느려져 천천히 책을 둘러보다 무심코 집어 든 책의 뒤표지 문구에 멈칫했다.


“제게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으신 당신처럼 저 역시 당신께 아무것도 남겨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 장의 사진도, 한 자락의 자취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까지도 당신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실 것입니다….”


집어 든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모르는 여인의 편지>라는 책이었는데 뒤표지에 인용된 본문 내용을 읽으며 ‘어우, 지독해’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어지는 문장 역시 마지막까지도 당신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나는 끝까지 내 이름도, 얼굴도 알리지 않고 떠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지독함에 이끌려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첫 장을 펼쳤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유명 소설가 R 씨는 낯선 글씨체의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당신에게”라고 시작되는 모르는 여인의 사연은 책 한 권이 거의 끝나가서야 “나의 사랑이여. 부디 안녕히…”라는 영원한 이별의 인사를 하며 마무리된다. 요약하자면, 당신은 끝까지 나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평생 당신만을 사랑하다 죽어간다는 사연이다. 조금 더 범상치 않은 사연을 덧붙인다면 자신의 아이가 사흘 밤낮을 앓다 죽었고 그 죽은 아이 옆에서 자신은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 곧 며칠 안으로 자신도 열병으로 죽을 것인데 혹시라도 다시 살게 된다면 이 편지는 당신에게 전달되지 않겠지만 만약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죽은 뒤라는 내용이다. 사연이야 특별한 사연이지만 별의별 억지스러운 막장드라마를 아는 내게 그쯤은 각별하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츠바이크의 필력 덕분인가. 한없이 여인의 편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이야기는 형언할 수 없는 외사랑의 이야기다.

사흘 밤낮을 앓다 죽은 자신의 아이 곁에서 꼼짝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여인은 펜을 든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하는 이에게. 제 영혼에 쌓인 진실을 고백하지 않고선 미쳐 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여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오직 ‘사랑하는 당신’만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당신’만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그런 이야기를 나는 버스를 타며, 걸으며, 여행지 곳곳에서 멈춰 서며,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는데 늦은 오후에 잠깐 만난 책방지기에게 그때까지 읽은 책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더니 “미저리, 미저리!” 하며 웃었다. 열세 살 적의 어린 동경을 한평생 사랑으로 품은 여인의 이야기가 광적인 집착의 대명사인 영화 <미저리>를 떠올리게 했나 보다. 그래 맞다. 미친 사랑, 미친 사람 이야기지. 아니, 이 여인은 제 감정을 강요하진 않았으니 <미저리>의 그 미친 ‘애니’는 아니라고 말해주려다 그게 뭐 별다른가, 어차피 어떻게 말해도 정상은 아니야, 하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조금 구분을 짓자면 내내 내 마음을 붙잡던 것은 그 여인의 무모하리만치 집요하고 광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그 여인의 ‘절망’에 내내 가슴이 들끓었고 침울했다. 여인은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쯤, 남자의 인생 어느 한 페이지에 등장한다. 때로는 스치는 무심한 눈길로만 만난 적도 있고, 우연처럼 만나 첫 경험의 밤과 며칠의 강렬한 밤을 보내기도 했고, 세월이 지나서는 또 우연히 만나 정열의 밤을 보내고는 거리의 여자로 오해받는 끔찍한 경험도 한다. 이렇게 간단히 늘어놓으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싶겠지만 남자는 모른다. 이런 의문은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해소되니 여기서는 갈무리하겠다.


당신은 그저 부담스럽지 않고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것만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운명의 틈바구니에 끼어드는 걸 당신이 싫어한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었으니까요. -70


여자는 남자를 잘 알고 있다. 그가 쓴 모든 글을 읽고, 그의 작품을 모두 외우다시피 하고, 보이는 모든 모습을 샅샅이 지켜본 터라 그가 어떤 유약한 내면을 가졌고, 비겁한 마음을 가졌는지 모두 알지만 사랑한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일에 “게으른 친절” 정도의 적당한 태도를 유지하며 귀찮거나 부담스러운 상황은 싫어하는 성향의 영혼에 마음이 꽂힌 죄로 여자의 사랑은 비극이다. 아마 여자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남자가 어떤 책임감이나 구속감으로 자신을 대하게 되는 상황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매번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그가 자신을 바라봐 주길 강렬히 원한다. 남자가 오롯이 자신을 알아봐 주고 그렇게 알아본 자신을 사랑하길 원했다고 해야 할까.



**뒤편의 이야기는 8월 2일(토) 업로드됩니다.

**인용글 출처: 슈테판 츠바이크, <모르는 여인의 편지>(고려대학교출판부, 2011)




"(재)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 2025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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