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입고, 오늘 입고, 내일 입어도 딱히 다를 것 없는 단출한 반바지와 티셔츠를 걸친 그가 걷는다. 딱히 목적지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현지인 인척 애쓰지 않고, 타지인의 머뭇거림도 없다. 그의 걸음과 몸짓은 에너지로 가득하다. 길거리 악사에게 기꺼이 삥을 뜯기고, 골목 한구석에서 시가를 피우는 사내 곁에 살그머니 다가가 셔터를 누른다. 관광객이 모인 곳에 은근슬쩍 끼여보고 식사는 뭐, 대충 길거리 음식으로 때우는 식이다.
류준열의 여행이 신선했다. 그동안 방송에서 다룬 여행이 가성비 좋은 맛집을 찾아내거나, 가는 곳마다 현실을 벗어난 해방감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그의 여행을 보고 누군가는 쿠바를 가고 싶지않을 수 있겠다고생각했다. 방송에서 얘기하고 싶은 여행은 언제나 덜 익고, 상처 난 것을 모두 걷어내고, 상품성 좋은 열매만 모아둔 과일바구니처럼 완벽한 것이었으니까.
힘없이 축 늘어진 가방, 대충 눌러쓴 모자. 여행자 류준열은 뭐 하나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 없는 여정을 본인의 옷차림처럼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그를 보며 여행자로 살았던 4년 전 어떤 시간이 떠올랐다. 2014년 7월 코펜하겐에 갔을 때, 나도 그처럼 카메라만 덜렁 메고 걸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손바닥에 침을 뱉어 방향을 정하진 않았지만, 구글 지도의 알람 대신 근거 없는 감각에 이끌려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어느 노부부를 만났고, 그들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는지 내게 지도 1장을 건네줬다. 어찌 된 일인게 30년 동안 종이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쿠바처럼 인터넷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굳이 지도를 따라 동서남북을 파악하고, 의심하며 걷다가 되돌아오길 반복했다. 지도에 표기된 건물이 실제로 나타날 때마다 어찌나 스스로가 대견하던 지. 내친김에 원래 목적지였던 박물관을 지도를 보며 찾아갔더랬다. 나중에 구글 지도를 보고 안 사실이지만, 2시간을 헤매서 찾아낸 박물관은 지척에 있었고, 별로 억울하진 않았다.
여행지에서 길을 잃고, 바가지를 쓰고, 맛없는 집을 골라 들어가는 것은 여행의 군더더기 같은 소재다.
1년 간의 자체 방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운 좋게 여행을 직업으로 삼게 되어 여행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타이트하게 짜인 취재 스케줄 안에서 길을 잃는 것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사고라는 것. 취재 후에 완성해야 할 상품성 좋은 과일바구니에 나 또한 설익고 어설픈 여행담을 담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방송처럼 여행 기사에도 완벽한 여행자와 파라다이스처럼 보여주는 여행지만 살아남는 법이다.
어떤 시대적 상황이 맞물려 여행이 부와 자유로운 라이프를 대변하는 상징적 소비가 됐다. 모두가 완벽한 여행, 특별한 경험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느 삶에나 그늘이 있듯, 군더더기 없는 여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이 삶과 닮았다는 진부한 말을 늘어놓고 싶진 않지만, 대부분의 여정이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모두가 계획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좋은 것만 보고, 보여주고 싶지만 그런 인생은 없는 것처럼. 나이를 먹을 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결코 용납할수없던 최악의 모습도 포용하게 되듯,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어떤 것이든 무덤덤하게 받아 들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요즘은 여행을 인생의 해방구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때론 돌아와서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더 깊은 나락에 빠지기도 한다. 얻는 것보다 잃는 여행도 많다. 가심비 면에서 명품 가방과 동남아 일주일 휴가를 골몰하는 걸 두고 누가 비난할 수 있나. 여행이 누구에게나 우위를 차지하는 건 아니다.그리고류준열의 여행을 보며, 여행이라는 욕망을 부추기며 돈벌이를 해온 나는 자문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앞으로는 어떤 여행을 해야할까? 그리고 여행에 대한 어떤 글을 전해야 할까.
*앞으로 제가 쓸 이야기는 여행 예찬의 글이 아닙니다. 자랑할 것 없는 여행의 군더더기 같은 소재로 연재합니다. 누군가 여행이 왜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을 때, 명쾌한 답변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환상을 걷어내고, 군더더기 같은 이야기만 쓸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