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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Mar 12. 2020

전염병 속 들끓는 욕망

SNS에서 재미있는 피드를 봤다. 코로나 때문에 집 안에만 있던 아이가 코로나는 밖에서 노는데, 나는 왜 집에만 있냐며 울분을 토했단다. 그 울고 싶은 심정 여기도 마찬가지다. 코로나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데, 왜 우리의 발은 꽁꽁 묶였냐 말이다. 엉엉.


경중을 잴 수 없이 국가 산업 전체가 흔들리고 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것처럼 여행 업계의 고충을 들을 때마다 가장 염려스럽다. 인력 감원, 연봉 삭감 등 표면으로 올라온 대기업의 뉴스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업을 접는다는 동종 업계의 소식을 접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소위 돈 안 되는 출판 인쇄 업계는 아무리 모기업의 탄탄한 울타리 안에서 기생한다 하더라도 경영 악화 같은 위기가 찾아오면 가장 먼저 희생감이 된다. 그때마다 회사가 아닌, 책 한 권에 매달려온 실무진도 덩달아 둥지 잃은 새가 되는 건 당연지사고.   


제 아무리 책을 잘 만들어도 회사 입장에서는 책이라는 게 수지 타산이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인풋과 아웃풋의 균형을 맞추기도 쉽지 않다. 밤낮 힘겹게 일하며 툴툴거리는 편집부의 응석을 받아주는 것도 지칠 것이다. 그럼에도 책 사업을 이어간다면, 책을 통해 광고 수익을 벌어들이고 다른 사업과 연계해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콘텐츠로 고수익을 노리는 시대가 도래했고 브랜드화된 플랫폼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돈을 버는 회사도 분명 있다. 하지만 개인 콘텐츠 사업이 더욱 각광받는 요즘엔 돈 많은 회사가 반드시 좋은 콘텐츠를 보여준다고 보장할 수 없고, 좋은 콘텐츠를 갖은 회사가 무조건 돈을 잘 벌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돈도 잘 벌고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며 회사 경영도 잘 돌아가는 회사는 안타깝게도 아직 듣도 보도 못했다.


매거진은 욕망을 펼쳐 놓은 것이라고 배웠다. 에디터가 되려고 패션 잡지에 입성했을 때, 나의 사수는 두툼한 잡지책 한 권을 찰싹찰싹 넘기며 사람들 내면의 욕망이 이 한 권에 다 담긴 것이라고 말해줬다. 실로 그랬다. 책 속에는 내가 당시 입고, 신고, 바르고, 만나고 싶은 사람까지 알차게 들어 있었다. 곧장 매장으로 달려가 사정없이 긁을 수 있는 신용 카드 조차 없었던 시절이라, 나는 갖고 싶은 물건의 사진을 오려 침대 머리맡이나 책상 앞에 붙여 놓여 놓곤 했다. 돌이켜보면 매거진을 만드는 내내 나는 우리 책을 열독 하는 독자인 동시에 직접 만드는 에디터였다. 내가 취재한 걸 새롭게 배웠고, 탐낼만한 건 책에 소개하기 전에 미리 사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행 잡지는 어떤 욕망을 담을까? 수 천만 원 원짜리 크루즈 여행? 전용기를 타고 유럽 도시를 돌며 최고급 호텔을 묵는 1억 원 대 올 인클루시브 투어? 물론 그런 기사를 쓴 적도 있다. 가격을 쓸 때 눈을 훔치며 몇 번을 확인했는지 모른다. 그보다도 여행 잡지에서 진정으로 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 떠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여행 작가 폴 서루의 말대로 여행의 동경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에 가서 현지인이 준 배탈약을 받아먹고 3일 내내 설사병에 걸려 죽을 뻔한 여행기를 읽고, '죽을 때까지 인도는 절대 가지 않을 테야'라고 다짐했을지라도 깊은 내면에는 인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자리잡을 것이다. 언젠가는 무심코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인도라는 나라는 말이지.. 어쩌고저쩌고' 라며 떠드는 자신을 분명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오랜만에 외출했다가 빳빳한 코팅으로 번쩍이는 잡지 코너를 보고 있자니 문득 저들이 우리의 일상을 대신 살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개개인의 외출 자제가 곧 나라를 구하는 영웅적 행위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에선 묵묵히 꽃놀이하기 좋은 여행지를 소개하고, 신상 봄 옷을 촬영하고, 화이트닝에 좋은 화장품을 소개한다. 전시 상황 같은 속에서도 우리의 욕망은 한결같이 그곳에 있다. 욕망을 간파하는 집요한 사람들이 묵묵히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둥지를 잃은 그들도 잠시 숨을 고르고 또 다른 둥지를 찾아 날아갈 것이다. 모두가 움츠러들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 지 모른다.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그들이 펼쳐놓은 욕망을 마구 실현하고 싶다.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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