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RE Mar 25. 2020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최소한의 짐으로 떠나는 여행

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시작하자. 전 세계의 코로나 경보가 종식되고, 비로소 여행을 준비하는 당신 앞에는 튼튼한 바퀴가 달린 캐리어와 등에 착 달라붙는 배낭이 준비되어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해 짐을 싸겠는가?


캐리어를 선택한 당신....

미안하게도 이건 심리테스트가 아니다. 그저 사적인 궁금증이다. 15년 지기 친구들과 각자의 여행을 이야기하다가 곧 죽어도 캐리어를 가져가야 한다는 여자와 단출하게 배낭 하나면 충분하다는 남자의 야기가 재미있어 글감으로 메모해둔 기억이 났다.


미니멀리스트는 우리의 소비가 얼마나 주체적인 것인지를 묻는다. 물건이 사람을 정의하는 시대의 공허함을 파고든다.


술자리에서 대수롭지 않게 나눈 옛날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 이유는 최근 넷플릭스의 다큐  <미니멀리즘 : 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소개된 여행자 때문이다. 출판한 책을 홍보하기 위해 장기간 북 투어를 떠나는 미니멀리스트 주인공은 작은 배낭에 능숙하게 물건을 채워 넣었다. 속옷, 여벌 티셔츠, 세면도구 등 금세 꽉 차는 좁은 가방에 들어갈 물건은 뻔했다. "여기에 들어가지 않은 물건은 가져가지 않아요." 그렇게 단출하게 짐을 싼 그는 텅 빈 옷걸이에 하나 달랑 걸려 있던 재킷을 꺼내 입더니 그 길로 차에 올랐다.


나도 그처럼 프라이탁 숄더백 하나만 덜렁 메고 여행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미니멀리스트여서는 아니었다. 런던에 살던 당시에는 저가 항공을 주로 이용하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위탁 수화물 추가 요금이 붙었고, 길어야 2~3시간 거리인 옆 도시에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가는 것도 물색없어 보였다. 그렇게 1년 간 유럽의 20여 개 도시를 그 가방 하나로만 다녔는데, 그때아무리 되짚어봐도 불편했던 기억은 전혀 없다. 오히려 매일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고(돌려 입으면 그만),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하지 않고(가져갈 가방이 없어) 여행의 순수한 즐거움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짐을 찾기 위해 멍하니 컨베이어 벨트 곁에서 보냈을 시간이나 짐이 제대로 도착할지 마음 졸이는 일을 치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큐를 보며 '그래, 한때 나도 (의도치 않은) 미니멀리스트 여행자였지.'라고 잠시 흐뭇해하다가 문득 옷장에 들어 있는 85리터 리모와 캐리어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저 캐리어를 살 때만 해도 너무 큰 걸 샀다고 후회했었는데, 이제는 출장을 갈 때마다 캐리어에 딱 맞게 짐을 꾸리게 된다. 짐이 많다는 건 걱정이 많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었다. 집에 돌아와 출장 짐을 풀 때면 혹시나 해서 넣은 물건이 캐리어의 반을 차지한 채 그대로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었던 적은 별로 없다.


"물건을 사는 것으로는 자신감도 목적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죠."


미니멀리스트는 말한다. 왜 인지 모르겠으나 이 말이 여행으로 치환되어서 들린다. 그러니까, 여행으로 자신감도 목적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으리라.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가방 하나 덜렁 메고 매달 낯선 도시를 전전하던 방랑자 시절에 체감했던 인생의 충만함 소환됐다. 뜻하지않게 커져 버린 캐리어가 지금 오늘날 나의 여행을 대변하듯, 발을 떼는 게 점점 무거워지고, 삶의 공허함은 더 커진 게 아닐까? 문득 코로나가 종식되고 마음 편히 비행기표를 끊을 수 있을 때가 오면 첫 번째 여행지는 전처럼 프라이탁 가방 하나만 들고 가볍게 떠나보고 싶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염병 속 들끓는 욕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