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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May 20. 2020

완벽한 여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실패를 말하기엔 아직 이르잖아요  

나의 첫 해외여행은 22살 때였다. 주변에서는 유럽 배낭여행이니, 국토대장정이니 당시 대학생이면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 같은 걸 한창 즐기고 있었다. 요즘 대학생은 안 그렇겠지만, 대학 시절 노는 걸 일생일대의 과제로 삼았던 나는 수업이 끝나면 서울 곳곳을 찾아다니며 탐방했기에 별도의 여행 욕구는 잘 못 느꼈다. 한가로운 평일 오후 시간, 낯선 동네 하나를 정하고 묵직한 필름 카메라를 들고 골목 구석구석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었으니,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일상이 여행 같은 나날이었리라. 


그럼에도 도쿄 여행을 계획한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라 덩달아 일본에 끌렸던 것 같다. 당시 어떻게 여행 준비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스마트폰 시대도 아니었으니, 벽돌 같이 무거운 노트북 같은 걸 들고 카페에 앉아 열심히 정보를 뒤졌을까? 분명한 건 친구와 나 둘 다 해외여행이 처음이라 서로의 욕심이 가득한 일정을 짰다는 것이다. 도쿄의 7월은 삼보일배가 아니라 삼보카페를 찾아 들어가야 할 정도로 무덥다는 것을 간과한 채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살인적인 더위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충만했던 우정이 여행이라는 시험대에 올라서자 사소한 일에도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 때문에 서로 마음이 상한 건지 지금은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 걸 보면, 사소한 것이 분명하지만 당시에는 친구를 향한 섭섭하고도 못마땅한 감정을 담아두기가 힘들었다. 


결국 여행 마지막 날 밤, 우리는 이자카야에서 꼬치구이와 사케를 나눠 먹으며 여행 내내 느낀 서로의 다름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았다. 술병이 가벼워질수록 서로가 어떤 거리낌도 없이 서로를 향했던 섭섭함과 원망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술기운이 올라와서인지 어떤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기보다는 서울에서는 그토록 잘 맞던 우리가 도쿄에서는 이토록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20대 초반의 관계에게 친밀과 소원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김연수 작가의 책 <시절 일기> 속 문장이 그때도 쓰였더라면, 여행하는 동안 애써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다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우리는 3박 4일의 속앓이를 통해 친밀과 소원의 어정쩡한 거리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김연수 작가의 저 문장을 수집하며 새삼 10년도 더 된 여행이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마 첫 해외여행에서 깊게 깨달은 배움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잊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거나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을 경험한다. 여행을 자주 해본 사람도 여행이 처음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행지에서는 일상에서는 감추고 살던 감정을 발견하기도 하기도 하고, 익숙했던 감정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여행을 잘한다는 것은 어떤 변수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대처한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이야 당시의 첫 여행을 어떤 배움으로 치환할 수 있지만(이렇게 글감으로도 쓰고 말이죠), 당시에 나는 여행의 어떤 효용도 잘 느끼지 못했고 그저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막연히 이국 생활을 꿈꾸곤 했다. 그 후로 몇 차례 해외여행을 더 했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엉엉 울어버릴 만큼 아쉽고 후회되는 여행도 많았다. 


하루 종일 맛집에서 줄만 서다 끝나버린 하루, 비가 와서 망쳐버린 일정, 동행인과 연을 끊는 경험, 목숨이 위태로운 위급 상황, 소매치기와의 조우, 항공사나 여행사와의 수확 없는 밀당 등. 이 모든 여행을 우리는 과연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 어디에선가 불현듯 어떤 여행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또다시 떠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넌 지금 여기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수많은 일들을 경험할 거야. 잊지 못할 만큼 행복한 순간도 있겠지만,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있을 거야. 그 어떤 경우도 이게 너의 여행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없어. 



김천에서 서울로 상경한 김연수 작가는 서울의 눈동자처럼 빛나는 남산타워를 보며, 이런 말을 건네받은 듯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더 나아질 것 같은 인생이 여전히 제자리로 느껴지는 것처럼, 완벽한 여행에 도달하는 일 또한 도무지 쉽지 않다. 그럴 땐 경험이란 우리의 실수가 쌓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속담이 위안이 된다. 여행을 할수록 늘어만가는 실수와 사건 사고가 시간이 지나면 배움이 되고, 경험으로 몸에 배면 언젠가는 완벽한 여행을 이끌 수 있으려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떤 여정도 그리고 지나온 후회스러운 인생도, 모두 나의 여행이었다는 변함없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게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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