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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May 07. 2020

누구나 여행하는 시대는 끝났다

어쩌면 꿈이었을 지 모를 여행

2015년 1월 마드리드 공항. 리스본행 게이트 앞은 한산했다. 리스본행 비행기에 오르고 나면, 이제 나에겐 정말 두 장의 비행기 티켓만이 남아 있었다. 리스본에서 런던으로 그리고 런던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10개월을 쉼 없이 떠도는 동안 질리도록 공항을 들락거렸고, 수화물 엑스레이 검사와 입국 심사를 누구보다 빠르게 끝내는 노하우도 몸에 밴 상태였다. 리스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문득 서울 도심을 돌아다니듯 유럽 도시를 넘나들던 호시절이 엔딩에 가까워졌음을 감지했다. 표면에는 아쉬움이 짙게 깔려 있었지만 깊숙한 곳에서 얕게 내뱉는 마음의 소리를 나는 들었다.


'아, 이제 좀 지치는군.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는 게 어때?'


아니, 그런데 과연 돌아가야 하는 곳이 어디일까? 당시 나는 런던의 으스스한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남부로 떠나와 리스본 친구 집에서 기생하고 있었고, 런던에서 놀러 온 친구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한 후 다시 리스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리스본에 도착하면 곧 런던행 비행기표도 끊어놓아야 할 것이다. 리스본-런던-서울.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미친 척 마드리드에서 곧장 서울행 비행기표를 끊어 이대로 한국을 가버리면 어떨까?라는 정말 미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시 내 지갑에는 유로 지폐 몇 장과 생활비로 빠듯하게 굴러가는 바클레이 체크카드가 전부였다.


리스본 공항을 빠져나오자, 야자수 나무 너머로 핑크빛 구름이 수채화처럼 그려있었다. 지난밤 마드리드 공항에서 했던 잡생각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고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비록 방 한 칸짜리 플랏에 빌붙어 살면서도 내 집이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런던에 도착하면 긴장이 탁 풀린 것처럼 리스본에서도 그랬다. 리스본에서 지낸 지 이제 한 달도 안됐는데, 그새 이 도시에 마음을 준 것인가. 떠돌이의 가벼움이란. 그렇게 몇 주를 리스본에서 더 보낸 후, 나는 런던으로 돌.아.갔.다.


이제 진짜 마지막 비행기표만이 나를 재촉했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 남은 것이다.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라고 하지만, 당시엔 그러지 않았다. 런던을 벗어난다는 게 오히려 집을 떠나는 심정이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앞둔 것처럼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흥미진진했던 드라마의 마지막 회는 언제나 빠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런던 생활의 막도 순식간에 내려앉았고,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뜨끈한 온돌방에서 며칠 째 잠만 자며 유럽을 자유롭게 떠도는 꿈을 꾸고 있었다. 시차 적응을 못해 종종 새벽에 깨곤 했는데, 그럴 때면 과연 눈에 보이는 게 현실인지 꿈 인지 헷갈려서 억지로 눈을 감기도 했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집으로 돌아왔건만, 몇 달간은 남의 집에 맡겨진 아이처럼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방황했던 것 같다.


당장 내일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호기롭게 한국으로 떠나온(?) 내가 다시 유럽 땅을 밟은 건 1년 후였다. 운 좋게 오스트리아 출장이 잡혀 간 김에 휴가를 붙여 런던까지 들렀다 왔다. 런던에 머무는 3일 동안 마무리 못하고 들어온 은행 업무를 보고, 친구들을 만나 펍에서 맥주를 마시고, 마트에 가서 필요한 생필품을 좀 사고 그게 전부였다. 대단한 감흥 대신 고향에 온 듯 몸이 기억하는 익숙함이었고, 놓친 게 있다면 다음에 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쿨하게 돌아섰다. 하지만 그다음이라는 시간은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런던에 못 간 지 벌써 3년이 넘었다.


런던에 살던시절을 떠올리면,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그토록 자유로웠는 지 기억이 아득하다. 혹자는 앞으로 누구나 여행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겁을 주는데, 사실 겁이 아닌 것 같아 나는 더욱 겁이 난다. 그렇게 되면 지금도 먼 이야기 같은데, 1년살이 런더너, 지겹도록 여행을 했던 장기 여행자의 삶이나 험지로 떠났던 여행 취재의 뒷이야기가 '라테는 말이야'로 변질될 것이고, 요즘도 가끔 대화를 하다가 '내가 런던에 살 때~'라고 말버릇처럼 나오면 스스로 참 재수 없어 보이는데 아마 더하면 더할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런던 이야기를 우려먹으며 이런 글을 쓰네요... 자, 이제 돌을 던지셔도 됩니다).


잠깐, 돌을 맞기 전 마지막 변명을 늘어놓자면, 사실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런던 사진을 정리하다 '돌아가는 길을 잊지 않으면 된다'라고 써놓은 메모에 혼자 울컥해서였습니다. 지금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나는 언제든 돌아갈,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을 미리 정해놓았지만, 여전히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니, 돌아가지 않고 있다. 과연 지금 나는 떠나온 것인가 돌아온 것인가? 런던에서 한국에 들어온 날부터 2박 3일 꼬박 방에만 처박혀 시공간을 구분하지 못했던 그때의 몽롱했던 세계가 다시 펼쳐진 것만 같다. 지난 일상이 쉽사리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지난 여행처럼 그리고 그동안의 모든 여행이 꿈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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