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RE May 30. 2020

고독이 엄습하면 무엇을 산다

여행 마그넷을 사는 심리

지난 달, 이사 준비를 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안 곳곳에 퍼져 있는 잡동사니를 주워 담는 것이었다. 괜히 남의 손을 탔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마음 쓰릴 것들을 주섬주섬 챙기다 보니, 깊이가 꽤 넉넉한 택배 박스 하나가 꽉 찼다. 잡동사니는 '잡다한 것이 한데 뒤섞인 것'이라고 사전에 명기돼 있지만, 잡동사니에도 나름 질서가 분명하다. 자석은 한데 모아 현관문에 모아 붙여 두고, 공항 기념품 샵이나 각국의 디자이너 작업실에 취재 갔다가 사온 기념 오브제는 책장에, 접시나 컵받침 등은 주방에서 제 역할을 한다. 산재해 있는 것을 한데 모아 놓고 나니, 그제서야 사전 그대로 잡동사니가 완성됐다.  


여행을 갈 때마다 병적으로 사모은 자석, 외국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구해온 아트북, 기념 선물로 사왔다가 전하지 못한 엽서, 짧은 인연과 주고 받은 편지, 유럽 수많은 도시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가져온 전시 팜플릿, 언젠가 다시 한번 찾아봐야지 했던 유럽 어느 상점의 카탈로그, 왜 받았는 지 모를 명함, 코펜하겐 길바닥에서 만난 찻집 남자가 자신이 디자인한 것이라며 건넨 북유럽풍 티백, 리스본 스타벅스에서 낯선 이가 그려준 지도와 메모, 로마에서 친구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선물로 준 2유로 기념 동전, 지금은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한때 유럽 게스트하우스의 상징이라 불렸던 셀피 스티커 사진은 2014년 겨울 베를린에서 찍은 것이었다. 그동안 서랍 깊숙한 속에 박혀 존재를 감춘 듯 보였지만, 여행의 잡동사니는 추억을 양분 삼아 내가 전 세계를 누비며 살았다는 걸 대신해서 기억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낯선 도시에서 갑자기 엄습하는 고독에 대항할 방법은 바로 무엇을 사면 된다. 그림엽서나 껌 그리고 연필과 담배를 사서 손에 쥐는 것. 그것이 그 도시와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조경란 작가의 <소설가의 사물>을 읽다가,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이야기를 빌려 써놓은 것을 봤다. 여행지의 공식적인 환영은 입국심사에서 치르지만, 입국장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대중교통의 티켓을 사거나 슈퍼에서 물 한 병을 사기 위해 현지 화폐를 내밀고 계산이 정상적으로 완료되면 그제서야 그 도시에 제대로 편입된 기분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낯선 세계에 두 발을 내딛은 여행자는 가장 먼저 무언가를 사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경한 외국어가 덕지덕지 붙은 식료품점, 발견하면 카메라부터 켜게 되는 길거리 꽃 가판대, 퀘퀘한 냄새를 품고 사는 빈티지 가구숍, 피곤에 찌든 직장인이 들끓는 동네 커피숍.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마음을 끄는 장면은 우습게도 나의 어제였을 지 모르는 일상 풍경이다. 그중에서도 외국의 야외 시장을 구경갈 때면 여행자는 감히 엄두내지 못하는 식자재를 능숙하게 골라 쇼핑하는 현지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부럽다. 물 위에 둥둥 떠오른 기름처럼 겉도는 여행자가 잠시나마 현지인과 뒤섞이는 순간은 무언가를 살 때다. 봉투가 필요하냐, 오늘 하루는 어떠냐는 식의 영혼 없는 대화와 돈이 오고 갈 때 여행자는 잠시나마 고독과 외로움을 잊어 버린다. 막대로 재빨리 휘휘 젓는다해도 기름이 물 속에 뒤섞이는 시간은 아주 짧지만 말이다.


'뭘 그렇게 기를 쓰고 사왔을까?'


여행지에서 사온 잡동사니를 데리고 4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약간의 후회와 죄책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때마다 추억의 유효기간이 지난 것 위주로 조금씩 덜어내긴 했지만, 여전히 박스 하나를 빈틈없이 채울 만큼의 여행 전리품을 간직하고 있다. 이사를 하고 일주일이 넘어서야 내 이름을 크게 써놓은 상자를 열어 제 자리를 찾아 주었다. 대부분 쉽게 깨지고 자잘한 것들이라 하나씩 조심스럽게 다루다가 남이 보기엔 쓰레기라 불러도 무방한 걸 애써 간직하는 이유를 더이상 '추억'으로 뭉뚱그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부터 여행을 많이 했다는 사람을 만나면 오랜 시간 고독과 불안의 시간을 자처하며 살아온 시간을 짐작하게 되는데, 이제보니 각국에서 내가 모아온 잡동사니도 그랬다. 고독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여행은 물건으로 치환되어 이미 소비됐거나 혹은 차마 소비하지 못하고 남겨뒀으리라. 여행지에서 사온 자석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컵받침의 프린트가 벗겨지고, 책에 때가 짙어질수록 여행지에서 외면했던 묵은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모든 여행이 좋았지만, 그 속에는 외로움과 고독과 불안과 슬픔의 시간이 물들어 있다. 삶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하루 하루의 일상은 고단하고 지난한 것처럼. 여행은 진작에 끝났지만 여행의 감정은 현관문에 붙여둔 자석 만큼 아직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완벽한 여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